나는 평소 우리나라의 화폐제도에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나라 돈은 외국의 화폐와 비교해 품질이 떨어진다. 고액권이 없어 10만원짜리 수표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도 문제였고 10원짜리 동전은 아예 통용되지 않을 만큼 돈 가치가 떨어져 이제 화폐단위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임기 중 해야 할 4대 과제 중 하나로 화폐제도 개혁을 한은 총재 취임 전부터 구상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취임 후인 2002년 7월 박철 부총재를 중심으로 한 17명으로 ‘화폐제도 개혁 추진팀’을 발족시켰다. 실무 총책임을 맡은 김두경 국장 지휘 하에 약 1년 동안 외국의 사례조사와 방대한 연구 작업을 마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보완대책까지 담은 1,094쪽에 달하는 종합보고서를 2003년 7월 대외비로 완성하였다. 이 작업에는 발권국의 박태원 전 국장과 정민교 차장 정상덕 과장 그리고 조사국 박진수 과장의 공헌이 매우 컸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새 화폐발행, 고액권 발행, 화폐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등 세 가지 개혁을 동시에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개혁이 왜 필요한 것인가.
첫째로 새 화폐 발행의 필요성은 주로 화폐의 품질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폐는 규격이 너무 커서 외제지갑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주화는 크고 무거워 소지에 불편하다. 특히 문제되는 것은 첨단 위조방지 장치가 없어 위조지폐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나는 중앙은행 총재회의에 나가 각국의 화폐를 돌려가면서 비교한 일이 있는데 우리나라 화폐가 가장 후진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으로 고액권 문제인데 당시 우리나라 최고액권은 만 원권인데 이것은 1973년에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 2003년 까지 30년 동안 경제규모는 130배 물가는 11배나 상승하여 화폐의 실질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0만 원 권 수표가 고액권 대용으로 통용되는데 수표는 이서를 해야 하는 불편이 있고 수명이 짧아 제조비가 화폐의 50배나 된다. 그 뿐 아니라 은행은 결제가 끝난 수표를 5년 동안이나 보관 관리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만 해도 2003년 기준 연간 6,000억 원에 이르렀다.
셋째로 화폐단위 변경 문제인데 10환을 1원으로 화폐단위를 바꾼 1962년 이후 2003년 까지 41년 동안 국민소득은 2,000배 이상 그리고 물가는 약 50배나 상승했다. 이러한 인플레 때문에 월급이 100만 원이라면 0이 6개나 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백만장자가 아니라 저소득자이고 10원짜리 동전은 아예 통용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대미 달러 환율이 네 자리 수이고 몇 년 안에 경(京, 1경은 1만조)단위를 써야 할 상황인데 이런 경우는 OECD국가 중 우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은행은 이 세 가지 개혁을 동시에 단행하는 개혁안을 마련하고 정부에 그 시행을 요청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이 세 가지 개혁은 각각 따로 할 수도 있지만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단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하자면 약 3년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 점을 감안하여 이 개혁조치는 2008년 1월1일을 기하여 단행한다.
② 화폐단위는 1000원을 1환으로 하여 대미 환율을 대체로 1:1로 유지토록 한다. 보조화폐는 1환을 100전(1전은 구 화폐 10원)으로 한다. 새로 발행하는 모든 화폐는 지폐의 규격을 축소하여 선진국 화폐의 평균규격에 맞추고 주화도 크기와 무게를 축소하고 지폐에는 최첨단 위조방지장치를 도입한다. 지폐인물은 김구 신사임당 정약용 장영실 등 새로운 인물로 대체한다. 이것은 여러 차례의 전문가회의와 국민여론조사를 거친 결과이다. 고액권은 100환(10만 원)권과 50환(5만 원)권을 새로 발행하고 화폐도안 인물로는 100환권에 김구 선생, 50환권에 신사임당을 채택한다.
③ 이와 같이 세 가지 조치를 동시에 단행하여 새 화폐는 2008년 1월1일부터 구권과 무제한 교환을 시작하되 1년 동안은 신구 권을 같이 통용토록 하고 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3개월 동안은 물품가격에 신구 권 가격을 함께 표시하도록 의무화한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고건 총리 김진표 경제 부총리 등을 만나 이러한 개혁안을 설명하고 이 조치의 단행을 여러 차례 설득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위폐방지를 위한 신권발행에만 동의하고 고액권 발행이나 화폐단위 변경에는 부정적이었다. 부정적 견해의 근거로는 인플레를 자극할 수 있다든가 뇌물주기 편해져 부패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다분히 일시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으로서 이런 우려로 인해 해야 할 개혁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 임기 중에는 신권발행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06년 나의 임기만료 석 달 전인 1월2일 우선 5,000원권의 신 화폐를 발璿像만?다른 지폐와 주화는 바로 내놓을 수 있도록 발행 준비만 해놓고 물러났다. 내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 곧 1,000원권과 1만원권의 새 지폐와 새 주화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국회에서 고액권 발행촉구 결의안이 채택되어 정부가 고액권을 발행키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2009년에야 5만원권이 나왔는데 10만원권은 아직도 발행되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화폐단위 변경은 언제나 될 수 있을지 아직 요원한데 이 조치도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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