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서 있었다. 이른바 삼전도비이다. 높이 395cm, 넓이 140cm이다. 이 비석은 1637년(인조 15)에 청나라의 요구로 세워진 승전비이다. 조선으로 보면 치욕의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1637년 3월에 청나라는 그들의 전승기념비를 세우라고 했다. 인조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한문 비문은 조선에서 지어 바치라고 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글 잘하는 이경석(李景奭)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 이경전(李慶全)에게 비문을 지어 올리라 했다.
이들은 물론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의리를 저버린 사람으로 낙인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세 사람은 2,3일 사이에 비문을 지어 바쳤다.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졸렬하게 지어 채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경석과 장유의 글이 청나라로 보내졌다.
청나라에서는 귀화한 명의 유학자 범문정(范文程) 등이 이경석의 글을 채택했으나 너무 간략하니 보완해서 올리라고 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아 간략하게 사실만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경석이 고쳐 쓰기를 싫어할 것은 뻔했다. 인조는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이것에 의해 판가름 나게 되어 있다.(중략)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 라고 하면서 간곡하게 비문개수를 부탁했다. 이경석은 왕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하는 수 없이 비문개수를 수락했다.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대제학이 없었고 이경석이 3월 13일에 제학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더욱 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경석이 고친 비문이 채택되었다. 비문의 글자 수는 1.009자였다. 한문 비문은 여진어와 몽고어로 번역되어 여진어는 전면에, 한문은 후면에, 몽고어는 우면에 실었다. 공사는 10월 30일에 모두 끝났다. 이경석은 이 비문을 쓰고 그의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어 글을 배운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경석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왕의 부탁을 받기는 했지만 모두 기피하는 비문 찬수를 국가를 위해서 자임한 것이다. 뒤에 청나라에서 북벌운동을 조사하러 나왔을 때도 효종은 모르는 일이고 영의정인 자기가 다 한 일이라고 주장해 백마산성에 갇힌 것도 이러한 이경석의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석은 1895년에 청나라가 세운 것이라고 파묻었던 것을 지금 어느 조그만 공원 가에 다시 세워 놓았다. 금년에 원위치(송파구 잠실동 47(석촌호수 서호언덕)로 복구했다고 한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이 비석을 우리는 우리의 국가안보를 굳건히 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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