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지역에서 벼농사를 짓는 김모(55)씨는 요즘 ‘쌀을 어디에 내다 팔까’ 고민에 빠졌다. 본업은 농사지만 김씨 지역 단위농협이 얼마 전 농지 넓이에 따라 재고쌀 판매를 할당했기 때문이다. 논 한 마지기(약 661㎡)당 20㎏짜리 쌀 1포대씩이라, 김씨에게 떨어진 몫은 무려 200포대를 넘는다. 형제와 친인척 등을 통해 겨우 서너 포대를 팔았지만 그 많은 쌀을 어떻게 처분할지 앞이 캄캄하다. 김씨는 “강제성은 없다고 해도 농협이 자기 몫을 소화하지 못하면 올해 수매량에서 그 만큼을 뺀다고 했다. 농민 둘 만 모이면 농사는 뒷전이고 쌀 팔 생각에 한숨만 쉬고 있다 농협 압력에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관련시리즈 3면
1년 후면 농협은 창립 50년을 맞는다. 농업 경쟁력 강화와 농업인 삶의 질을 높이는 게 당초 설립 이유였고 일정 부분 기여를 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불만의 소리가 높다. 비대해진 조직, 떨어지는 효율성, 중앙회장에서 조합장까지 툭하면 터지는 비리, 그러다 보니 일선 농업현장에선 농협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농협개혁을 강도 높게 요구한 지도 1년반이 지났지만, “과연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나”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던 농협이 운영하는 하나로클럽ㆍ마트에는 국내산이 아닌 수입산 상품이 넘친다. 심지어 바다를 끼고 있어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의 하나로마트에서도 외국산 수산물을 판매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몸집 불리기에 급급해온 하나로클럽과 마트는 이제 지역 상권을 거머쥐며 대형마트나 SSM에 필적할만한 ‘공룡’으로 성장, 지역 소상공인들을 위협하고 있다.
농협중앙회가 사료공급 시 신용카드 결제를 외면하는 행태도 축산농가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매월 180억원 상당의 조사료, 배합사료 등 50만톤을 전국 142개 회원축협에게 공급하는 농협중앙회가 현금결제를 고집하자 축협들도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현금결제를 요구하는 악순환이 생겼다.
농협은 또 농약 값을 부풀려 농민들로부터 폭리를 취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농협중앙회가 농약제조업체들과 일괄구매계약을 체결하며 농약을 저가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업체들을 압박한 사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드러나기도 했다. 보다 싼 값에 농약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농민들은 울화통을 터뜨리고 있다.
잊을 만하면 대출비리가 터져 나오고, 조합장 선거만 치렀다 하면 선거비리가 봇물처럼 쏟아진다. 역대 중앙회장들은 제왕적 지위를 누리며 이권에 개입하다 쇠고랑을 차곤 했다.
이 같은 농협의 행태를 근원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해 지난해 말 신용ㆍ경제사업 분리를 골자로 하는 농협개혁법안이 국회 제출됐지만, 농협의 반대로 별다른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새로운 국회 원(院)구성을 계기로 농협이 법안의 반전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지금의 농협문제는 법이나 제도가 바뀐다고 해결될 사안은 아니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아무리 중앙회장을 비상근으로 바꾸고,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한다 해도 근본적인 행태와 발상을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농협개혁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농협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마인드개혁이 더 절실하다” “농협을 위한 농협이 아닌 농업과 농민을 위한 농협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