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마포署, 탈북자 대학생들에 영어강습/ "까막눈 영어, 경찰서서 눈 떴어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마포署, 탈북자 대학생들에 영어강습/ "까막눈 영어, 경찰서서 눈 떴어요"

입력
2010.07.18 17:30
0 0

"고기가 익은 정도를 구별할 때, 레어(rare) 미디엄(medium) 웰던(well done)이라고 해요. 자 따라 해 볼까요?"

장맛비가 쏟아진 17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경찰서 2층 회의실에선 낯선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가렸다. 온몸이 흠뻑 젖은 학생들과 달리 책상 위에 놓인 톨스토이의 단편집과 실용영어 단어집 등은 반짝 빛났다.

강사로 나선 윤귀영(60)씨는 영어단어들을 칠판에 빼곡하게 채운 뒤 평균 실력이 중학교 2학년 수준이라는 제자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의 제자 12명은 경찰관이 아니었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대학생들을 위한 영어과외수업 현장이었다.

수업은 약 1년 전인 2009년 8월 시작됐다. 북한 이탈주민들과 결연을 맺고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던 마포서는 새터민 대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게 영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북한에선 영어수업이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대학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증언들이 쏟아졌던 것이다. 2007년 탈북한 서모(28ㆍ동국대 경영학과2)씨는 "회화는 고사하고 취업에 필요한 토익(TOEIC) 시험도 볼 실력이 안돼 환장하겠다"고 했다.

남한 친구들의 실력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배울 기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부가 주는 월 보조금 40만원이 주요 수입인 이들에게 비싼 영어학원 등록은 언감생심이다. 강사 윤씨는 "특례입학으로 대학은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어도 한달 방세(고시원) 23만원을 내면 17만원으로 한달 생계를 꾸려야 해서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당시 마포서의 보안협력위원으로 있으면서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김본심 동아영재교육원 원장이 무료 영어교육을 제안했고,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을 모아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서울 서초구의 한 학원에 공간을 마련해 수업을 시작했고, 3개월 전 학원이 문을 닫자 마포서 2층으로 아예 둥지를 옮겨왔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번 약 두 시간 정도고,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쯤엔 마포서가 무료로 저녁식사도 제공한다.

자원봉사 차원이지만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실력과 경력은 여느 유명학원 강사 못지않다. 대부분의 강의를 맡고 있는 윤귀영씨는 미국 하와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2년간 뉴욕에서 영어공부를 한 뒤 1989년부터 15년간 중앙대와 성균관대 등에서 영어강사를 했다. 이날 회화 수업을 진행한 에릭 허트만(61ㆍ미국)씨는 EBS 영어강의 강사를 맡고 있다.

김본심 원장은 "탈북 대학생들을 돕는다고 하니까 강사들이 흔쾌히 수락하며 이렇게 1년 가까이 수업을 맡아주고 있다"며 "윤씨는 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없으면 여의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불러 수업을 해줄 만큼 헌신적"이라고 말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학생수가 3명에 불과했지만 입 소문을 타면서 지금은 15명까지 늘어났다.

이날 학생들은 윤씨의 질문에 번쩍번쩍 손을 들며 답했다. 윤씨가 "미국의 문화 중에 생각나는 게 뭐가 있냐"고 묻자 박모(24ㆍ서강대)씨가 "statue of liberty(자유의 여신상)"라고 답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준 선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전세계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허트만씨의 설명도 이어졌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자 허트만씨는 "남한과 북한은 결국 하나의 통일(unification)을 이뤄내지 않겠냐"며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이 장차 좋은 인재가 돼 다가올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을 끝으로 약 한 달간의 방학이 시작된다. 1년 전 수업이 시작된 후 처음 갖는 방학이다. 윤씨는 "학생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고 8월 22일 다시 수업이 열린다"고 했다.

윤씨는 방학 기간에 딱 한가지 변화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이(그는 대학생들을 굳이 아이라고 불렀다)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거지만 탈북 대학생들의 생활고가 정말 심각해 밥을 안 먹고 다니거나 차비가 없어 여기 못 오는 친구들도 많이 봤어요. 아이들에 대한 지원이나 후원이 좀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마포서는 올해 5월 마포사회복지협의회와 협약을 맺고, 수업에 오는 탈북 대학생에게 장학금 30만원과 교재비 20만원을 전달했다. 이달부터는 매달 5만원씩 생활보조금도 지원할 계획이다. 윤씨는 "먹고 살기도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무작정 공부하라고 말하는 것도 안쓰러운 일"이라며 "학생들을 위한 경제적 도움도 수업과 함께 병행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후원문의: 김본심 동아영재교육원 원장 (02)535-3488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