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색의 봄’전에서는 좀 더 가까이 작품에 다가가야 한다. 백색의 전시공간에다 작품들 역시 온통 흰색이라 언뜻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작품을 살펴보면 그 속에서 수많은 형상들이 살아나온다.
서울대미술관과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이탈리아 작가 16명, 한국 작가 12명이 참여해 회화, 사진, 비디오, 설치 등의 장르를 통해 백색이라는 공통의 테마를 탐구한다. 흰색이라는 하나의 색깔이 얼마나 많은 형태와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특히 빛과 연관된 작품들이 많다. 파브리치오 코르넬리는 철제 조각을 벽면에 수직으로 설치한 뒤 그 아래 조명을 비춰 여인, 토끼, 여우 등의 실루엣을 그림자로 만들어낸다. 한 편의 동화가 전시장에서 펼쳐지는 것 같다. 카를로 베르나르디니는 흰색 상자 안에 광섬유를 설치해 빛의 흐름을 보여준다.
권대훈씨가 전시장 양쪽 벽면에 설치한 ‘숲에서 길을 잃다’ 는 한층 신비롭다. 나무판 위에 촘촘하게 박힌 작은 조각들은 조명이 바뀜에 따라 나무가 울창한 숲이 되었다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가, 아무 의미없는 점들의 반복이 되기도 한다.
흰색은 드러내는 듯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이중성을 표현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프란체스카 포토는 점자 글씨가 가득한 흰색 종이를 실로 엮어 걸어두었다. 손을 뻗으면 오톨도톨한 표면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뜻은 해독할 수 없다. 국동완씨는 자신이 꾼 꿈을 흰색의 책꽂이와 거기에 꽂힌 33개의 흰색 카드로 풀어냈다. 각기 다른 간격으로 꽂혀있는 카드를 꺼내 열어보면 꿈을 꾼 날짜와 함께, 연결이 되지 않는 몇 개의 단어들이 암호처럼 적혀있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으로 히치하이킹을 하며 세계의 분쟁지역을 다니는 퍼포먼스를 펼친 피파 바카의 사진들도 전시됐다. 그의 퍼포먼스에서 흰색은 상처를 치유하는 평화와 생명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한국 작가들 중에는 종이에 스며드는 수묵의 느낌과 여백의 미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놓은 이들이 여럿이다. 양민하씨는 바닥에 쌓아놓은 흰색 돌 무더기 위로 검은색 그림자의 영상이 번지듯 일렁이는 미디어아트 작품을 전시했다. 정용국씨가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뿌리없는 나무’는 멀리서 보면 식물의 이미지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인체 장기들의 조합이다. 흰 벽면에다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최인수씨의 간결한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은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김행지 학예사는 “흰색이 단순한 색의 부재가 아니라 생명과 빛 등 다양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음을 여러 조형언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9월 26일까지. (02)880-9404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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