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섬말 시편 - 잎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섬말 시편 - 잎

입력
2010.07.18 12:06
0 0

아무도 없는 새벽의 강가에 선다. 고인 듯 흐르는 강물은

저 혼자 흐르고, 수면 위에는 희미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저 고인 듯 흐르는 흐름의 속삭임은, 갈대의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겠지만, 새들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갈대밭도 적막 한 채 짓고 미명 속에 잠겨 있다. 이 고요는

적막의 문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여서, 내가 한 잎으로

돋아나야만 흐름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아, 발소리도 죽인 채

가만히 새벽의 강가에 서면, 내 그림자도 물 위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처럼 수면에 젖는다. 이 혼융은, 강바닥에

가라앉은 돌의 눈빛을 지니고 있어, 몸 낮춘 것들의 흐름이

물결무늬로 어룽져 와, 그 흐름이 가 닿는 소실점도 갈대의

눈시울에 젖는다. 어쩌면 저 갈대의 흔들림 속에도 아름드리

적막을 베어 넘기는 벌목의 바람이 묻어 있으리―베어 넘긴

적막으로 뗏목을 만들어 세찬 여울을 타고 흐르는, 숨결도

묻어 있으리―그래, 자신의 심장을 스스로 꺼내볼 수는 없겠지만

강바닥에 가라앉은 돌의 눈빛으로 몸을 낮추면, 저물어서

뉘어놓았던 마음들도 저 흐름의 결대로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도 이 새벽, 아무도 없는 강가에 혼자 툭 돋는다

제 심장을 제가 꺼내볼 수는 없겠지만, 마치 搰木에서

버섯이 돋아나듯, 그렇게 한 잎으로 툭 돋는다

● 우리가 허망한 말들, 가벼운 말들, 거짓된 말들을 더 잘 듣는 건 그것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도 들리는 소리들이기 때문이죠. 확성기를 든 장사치의 목소리 같은 것들. 우리에게 중요한 말들은 그렇게 크게, 또렷하게 들리지 않지요. 귀를 기울여야만 하지요. 새벽의 강변에 나가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사람이라면 알겠죠. 귀를 기울인다는 건, 온몸으로 듣는다는 뜻이라는 걸. 침묵 속에는 침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러고 보니 언젠가 내가 들은 강의 낮은 음성에는 이런 게 있었습니다. ‘어떤 강도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