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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박영준이 가야 할 길

입력
2010.07.1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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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7일 청와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40년 동지이자 심복인 권노갑씨와 마주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DJ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권씨에게 “잠시 외국에 나가있게”라고 권했다.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지시였다. 정동영 의원 등 민주당 정풍파들이 “각종 비리사건으로 혼란한 정국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인사와 국정을 좌지우지한 권노갑 고문과 박지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사퇴해야 한다”고 요구한 데 따른 DJ의 고육책이었다.

DJ는 권씨가 당연히 외유를 받아들일 줄 알았다. 평생 한 번도 명을 거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앞서 박지원씨는 DJ의 사퇴 지시를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권씨는 이를 거부했다. 권씨는 결백을 주장하며 “다시 외유를 하면 비리를 인정하는 꼴인데, 자식들 볼 면목이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DJ는 실망을 넘어 분노했고, 그 뒤로는 권씨를 찾지 않았다.

9년 전 권부 깊숙한 곳에서 이루어졌던 이런 대화가 지금 재연되고 있다. 국정 농단과 인사 전횡의 중심인물로 박영준 총리실 국무차장이 지목되고 사퇴 압박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는 억울해 하며 버티고 있다. 총리실의 한 간부는 “박 차장은 그 동안 조심, 또 조심했다고 항변하더라”고 전했다. 물론 박 차장도 정권 출범 초기 인사를 주도했던 점은 인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불화에 책임지고 2008년 6월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에서 물러나 7개월 동안 야인생활을 했는데, 이제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까지 떠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항변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심이 떠난 게 어찌 차관급 한 사람 때문일 수 있겠는가. 시장주의를 외치면서 정부 주식 하나 없는 금융권 인사에 개입하고, 법치를 강조하면서 사법부 결정을 능멸하고, 자유주의를 강조하면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식 사회를 봤다는 이유로 김제동씨가 방송에 나오지 못하고…. 선거 패배를 가져온 이런 모순과 오만한 행태들이 어찌 박영준 한 사람의 책임이겠는가. 한나라당이나 청와대의 주요 인사들, 더 나아가 이명박 대통령에 진짜 책임이 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 차장은 권노갑씨가 갔던 길을 가야 할까. 그것은 자신도 죽이고, 이 대통령도 어렵게 만드는 하책이다. 대통령을 위해 헌신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는 서운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상념을 털고 스스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다.

망각하고 있을 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원죄가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압승을 거두고도 이처럼 짧은 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데는 그가 주도했던 ‘고소영 강부자’ 조각이 그 시발점이었다. 공신들조차 갈라놓았던 이른바 ‘박영준 사람들’의 인사 독점과 전횡도 있었다.

만약 그가 계속 버틴다면, 그것은 이 대통령이 책임을 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세상 어디에도 측근을 위한 대통령은 없다. 대통령을 위해 측근이 희생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차관급 인사 때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방안이 거론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죽어야 한다면 처절하게 죽는 게 사는 길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도 9년 전 깨끗이 죽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는 감옥에도 갔다. 도저히 회생할 것 같지 않았지만 살아났다.

더욱이 박 차장은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30, 40년을 모셨던 DJ, YS의 측근들과는 격이 다르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대통령은 이른바 측근들에게 빚이 없다. 요즘 논란이 되는 선진국민연대의 핵심들도 대선 2, 3년 전 세상 사람들 모두가 ‘MB 대통령’을 예상하던 때 들어왔을 뿐이다. 박 차장을 비롯해 그들이 “MB를 위해 갖은 고초를 겪었는데 어찌…”라고 외친다면 세상이 웃을 것이다.

이영성 편집국 부국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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