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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잊지 못할 모습들] (8.끝) 제공권을 장악하라, One for All & All for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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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잊지 못할 모습들] (8.끝) 제공권을 장악하라, One for All & All for One

입력
2010.07.16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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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신이 죽고 사는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적의 탱크 한 대, 군수공장 한 곳이라도 더 격파하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조종간을 잡고 적진으로 날아갔죠.”

배상호(82ㆍ예비역 소장) 공군참전유공자회장은 6ㆍ25전쟁 당시 조종사로서의 절박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매번 격추될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조준 사격을 했던 당시의 전장상황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6ㆍ25전쟁 때 119회 출격했어요. 저보다 앞서 100회 출격을 넘긴 조종사는 7, 8명에 불과하지요. 많은 선배와 동료 조종사가 스러져 갔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 기적이죠.”

그는 어릴 적부터 전투기 조종사가 꿈이었다. “대구비행장 주변에 살면서 보았던 민항기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949년 2월 공군병 모집 벽보를 보고 입대했지요. 그 해 6월 공군 첫 조종학생을 모집한다기에 다시 자원했어요.”

160명의 응시자 중 26명이 뽑혔다. 고된 훈련에 다시 16명이 탈락하고 10명이 남았다. 그때 6ㆍ25전쟁이 발발했다. “우리는 정식 조종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선배 조종사가 조종하는 L_4연락기 후방석에 타고 수류탄을 떨어뜨리는 임무를 맡았어요. 수류탄 핀을 뽑은 뒤 하나 둘 셋 하고 아래로 냅다 던지면 공중 300피트(약 91㎙)에서 터지는데 그러면 인민군이 놀라 도망갔죠. 그러면서 적이 남하하는 걸 지연시켰어요. 비행기에 공격 능력이 없으니 그게 최선이었지요. 하지만 북한군의 거센 공세에 지상군이 계속 밀렸고, 결국 퇴각하는 국군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같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 군에는 일제시대 때 비행기를 몰았던 조종사들이 수십 명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들여 온 비행기와는 종류가 달랐다. 따라서 충분한 기종 전환 훈련이 필요했지만 전세가 최악으로 치닫자 군은 이들을 급한 대로 전장에 투입했다. 당연히 사고가 빈발했고 조종사들이 속절없이 죽어 갔다. 제대로 된 조종사를 양성하는 것이 절실했다. “51년 6월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이러다 앞날이 창창한 조종사들이 다 죽겠다’며 제주기지로 기존 조종사들을 보내 훈련시켰어요. 우리 조종학생들은 경남 사천시에서 훈련을 받았구요. 하지만 시설이 열악하다 보니 땅에 쭈그리고 앉아 조종간 대신 막대기를 잡고 항법을 익히기도 했어요. 그곳에서 모두 7명의 조종사가 빨간 마후라를 달았지요.”

52년 2월 마침내 강원 강릉기지로 투입됐다. 북한과 바로 맞닿은 공군의 최전방 지역이었다. “F_51무스탕 전투기를 몰았어요. 최신 기종은 아니지만 듬직한 게 훈련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어요. 엔진 스위치를 앞으로 힘껏 누르면 이놈이 펄떡거리며 굉음을 내는데 얼마나 감개무량하던지. 매일같이 전투기를 어루만지며 ‘이제 너와 나는 죽어도, 살아도 같이 가는 거야’라고 수없이 다짐했어요.”

2월 3일 첫 출격을 했다. 당시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정체돼 있었다. 전투기들은 강릉기지를 이륙해 적의 후방인 황해도 사리원시, 겸이포(현재의 송림시), 강원도 평강군 등에 있는 군수공장과 병참기지, 병력 집결소를 주로 공격했다. 적의 보급로와 지원 부대를 끊어 숨통을 죄기 위한 전략이었다.

“8월 평양대폭격작전이 있었어요. 대동강철교 바로 밑에 인민군들이 벌떼같이 주둔해 있는데 거기에 폭탄을 퍼붓고 돌아오는 임무였죠. 평양에 들어서자 적의 진지에서 쏘아 대는 고사포가 얼마나 많던지 하늘이 시커멓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요. 보통 편대로 4대가 출격하는데 앞서가던 전투기의 방향을 잃을 뻔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서 어떻게 용케도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아픔도 많았다. “황해도 해주시로 출격했는데 앞서 가던 선배 조종사가 폭격을 하고 나서 위로 날아오르지 않고 계속 밑으로 내려가는 거에요. 무전으로 왜 자꾸 내려가느냐고, 어서 방향을 바꾸라고 울부짖다시피 했지요. 하지만 결국 적진 한복판에 충돌해 산화했어요. 아마도 풀 숲에 숨겨 놓아 보이지 않던 기관총에 조종사가 직접 맞은 것 같아요. 보통 대공포는 눈에 띄지만 사방에 흩어져 있는 작은 무기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조종사가 위에서 내려 퍼붓는다고 해도 눈 뜬 장님일 때가 많죠. 후배들에게 잘해 주고 무척이나 촉망받는 선배였는데….”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52년 6월쯤인가, 겸이포에 있는 군수공장을 폭격하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분대장이 브레이크라고 소리쳤어요. 갑자기 미그15전투기가 튀어나와 공격하는 거에요. 미그15는 당시 최고의 전투기로 제가 몰던 F_51과 비교하면 마치 대학생과 초등학생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얼마나 거리가 가까웠던지 적기의 인테이크(전방 흡입구) 구멍이 마치 커다란 동굴처럼 보이는 거에요. 젊은 호기에 한번 붙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우리 임무가 따로 있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죠. 6ㆍ25전쟁이 끝난 후 미그15와 견줄 수 있는 미국의 F_86기를 몰았는데 그때의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더라고요.”

지상부대의 든든한 지원은 조종사들에게 큰 힘이 됐다. “정비사들의 능력이 무척 뛰어났어요. 밥 먹듯이 밤을 새워 가며 전투기를 구석구석 살폈죠. 활주로가 울퉁불퉁한 비포장이었으니 얼마나 잔 고장이 많았겠어요. 전투기가 이륙하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돼 완벽하게 움직여야 하거든요. 우리가 출격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활주로에서 두 팔을 맞잡고 환호성으로 맞이하곤 했죠. 하나가 전체를 위해, 전체가 하나를 위해 희생하는 공군의 정신(One for All & All for One), 그게 전장에서 맘 놓고 싸울 수 있는 밑거름이었어요.”

배 회장은 후배 조종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전쟁 무기가 우리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바로 마음가짐이죠. 언제든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칠 준비가 돼 있다는 그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 6 25 발발 당시 南공군전력은 연락기 12대와 훈련기 10대뿐

22대 198. 6ㆍ25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항공기 보유 대수다. 남한은 절대 숫자는 물론이고 전투력에서도 북한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남한의 항공기는 무장이 없는 L_4/5연락기 12대와 기관총 2정을 장착한 AT_6훈련기 10대가 전부였던 반면, 북한은 YAK_9전투기 100대, IL_2/10지상공격기 75대, PO_2/TU_2폭격기 18대 등 막강 화력으로 무장했다.

이처럼 공군력이 부실했던 것은 미군정이 군비 증강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 북한을 자극해 전면전을 유발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미국의 항공기원조계획이 1950년 1월 무산됐다. 이에 국민들은 항공기 헌납 운동을 벌였고, 3억5,000만원의 성금을 모아 AT_6 훈련기 10대를 건국기라는 이름으로 도입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육상의 탱크와 하늘의 전투기를 앞세운 인민군에 국군의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미국은 로켓과 폭탄, 기관총을 장착한 F_51전투기(일명 무스탕) 10대를 무상원조하기로 결정했다. 무스탕은 프로펠러기로 당시 미국은 이미 제트기로 전환한 단계였다.

이번에는 전투기를 몰 조종사가 문제였다. 한국 공군은 부랴부랴 10명의 정예 조종사를 선발해 일본 큐슈(九州)의 미군기지로 보냈다. 이에 미군은 8군 소속 딘 헤스 소령 등 교관 10명과 수십 명의 정비병을 파견했다.

관건은 시간이었다. 미군은 조종사들이 최소 2, 3개월 정도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10명의 조종사들은 한시라도 빨리 전장에 투입되길 원했다.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귀국을 손꼽아 기다리는 국민들의 염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도착 후 5일간 계속 비가 내려 실내에서 매뉴얼 교육만 받았다. 날이 개자 조종사들은 30분간 이ㆍ착륙 훈련을 받았다. 그게 훈련의 전부였다. 미군은 만류했지만 조종사들은 F_51전투기를 인수한 뒤 바로 현해탄을 건너 대구기지로 향했다.

1950년 7월 3일 첫 출격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7월 16일 미군과 합동작전을 시작하기까지 한국 공군은 독자적으로 탱크 4대, 차량 14대, 연료ㆍ탄약보관소 12곳을 파괴하고 적병 2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또한 일본에 있던 미군 훈련요원들도 한국으로 넘어와 조종사 양성교육을 계속했다. 이후 미군의 추가 원조에 따라 대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80여기의 F_51전투기를 운영하는 독립부대가 창설되면서 대한민국 공군이 기틀을 갖추게 된다.

김광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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