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이 파탄이 나는 데는 100일도 걸리지 않았다. 3개월 전 아이는 동급생들에게 3시간에 걸쳐 폭행을 당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들 일이려니' 생각했다. 해당 학교 역시 아이들의 다툼으로 치부한 채 초기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됐고, 부모 역시 우울증과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고 있다.
14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아이 아버지 박모(52)씨를 만났다. 오붓했던 가정, 천진난만했던 아이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딸을 위해, 가정을 위해 안간힘을 내고 있었다.
4월 12일 초등학교 6학년 딸 수진(13ㆍ가명)이는 학교를 마치고 특기적성교육(방과후수업)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다섯 아이가 앞을 가로막고 둘러쌌다. 수업시간에 보낸 "죽을래"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수진이를 인근 아파트단지 등지로 끌고 다니며 뺨을 때리고 발로 찼다. 악몽의 3시간이었다.
수진이의 온 몸은 생채기로 가득했다. 병원 진단 결과 뇌진탕, 얼굴 좌상, 집단 구타로 인한 정신과 치료 필요의 소견이 나왔다.
경찰서에서 만난 가해 학생들은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한 아이의 엄마는 "아이들끼리의 일인데요. 용서하시죠"라고 말했다. 용서를 빌었지만 고개는 빳빳했고 말투는 억셌다.
박씨는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내 진정했다. '아이들의 일이니 앞으로 잘 지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로 찾아온 담임 교사 역시 확실한 사후 처리를 약속했다. 박씨는 "그 때 너무 마음을 약하게 먹었다. 좀 더 독하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후 수진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왕따가 됐다. 핀을 머리에 꽂고 가면 "네가 핀이 어울려"라는 비아냥이 36명 가득한 교실에 퍼졌다. 수진이는 인근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박씨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울고, 오줌까지 지린다. 정신과에서도 위축, 불안,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학교는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안일한 대처로 수진이의 상태를 악화시켰다. 학교폭력예방및대책에관한법률(2004년 시행)에 따라 수진이 사건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자치위)를 통해 가해자 제재 등의 대처가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자치위는 열리지 않았다. 자치위 심의 자체를 결정하는 간부 교사 회의인 선도위원회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학교 관계자는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간에 합의가 원만하게 이뤄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더구나 자치위는 결과에 대한 이행 강제성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본보 10일자 8면)을 받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내 초등학교 자치위에서 벌인 심의는 12건에 불과했다.
학생 심리 상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순환 상담 교사가 가해학생을 상담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상담은 부모의 동의를 요한다. 가해자 부모가 "내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항변하면 방법이 없다.
학교 관계자는 "수진이가 이 정도인지 몰랐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모든 책임과 관리가 담임에게 집중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온전하게 보듬을 시스템이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박씨는 결국 지난 주 수진이를 인근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하지만 아이는 그 곳에도 등교하지 못했다. 가해자의 친구가 그 곳에 있었다. "내 친구가 너 때문에 경찰서에 갔다며"라는 말이 첫 인사였다.
박씨는 결국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15일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보고했다면 인권위에서는 도울 일이 없다"고 했다. "내 걱정하지마, 나 학교 잘 다닐게"라는 수진이의 말에 아버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내 아이는 평생 상처를 안고 살 것이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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