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카의 무대'를 40년간 공공디자인… 살고싶은 도시 1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항구라는 공간이 트로트의 감성과 결합하는 친연성을 보여준다. 비린내와 짠내가 섞이는 신파의 화학작용이다. 일본에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가 있다. 1968년 발표돼 메가히트를 기록한 대표적 엔카 곡이다.
"아루이떼모 아루이떼모(걸어도 걸어도)~"의 달차근한 멜로디는 한국인의 귀에도 익숙한데, 그래서인지 요코하마(横浜)라는 도시도 퇴락한 부두의 애잔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개항한 지 151년이 된 이 항구도시는 현대화된 일본에서도 가장 세련된 도시로 꼽힌다. 뽕짝의 무대에서 40여년 만에 일본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로 탈바꿈한 배경에는, 도시 디자인에 대한 요코하마시의 철학과 일관된 정책이 있었다.
공공 디자인에서 찾은 도시 재생의 길
요코하마는 습도가 높아 여름 무더위가 일찍 찾아오는 도시다. 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30분, 요코하마 칸나이 역에 내리자 그러나 왠지 모를 상쾌함이 느껴졌다. 단순하고 모던한 느낌의 건물과 조경은 시원시원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고, 유리 외장의 날렵한 고층 건물 사이사이엔 고풍스러운 근대 건축물들이 묵직한 존재감으로 버티고 있다. 반듯하면서도 불규칙함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은 도로에도 동감(動感)이 살아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무척 시크하다.
요코하마가 처음부터 세련된 도시는 아니었다. 19세기 중엽 미국에 의해 개항된 이래 상업ㆍ공업중심지로 변모하며 도시가 확대되는 과정에, 근대 도시가 겪는 무질서에서 요코하마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요코하마는 도시의 절반 가까이가 파괴됐다. 급격한 도시화 바람이 다시 분 1960년대부터 이 도시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견지했는데, 그것은 '요코하마만의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요코하마시는 그 길을 공공 디자인에서 찾았다.
요코하마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아카렌가소고(赤レンガ倉庫)로 갔다. 1905년 지은 부두 보세창고다. 붉은 벽돌로 된 3층 건물 2개 동이 마주보고 있는데,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요코하마의 공공 디자인 콘셉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컨테이너 수송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1989년 이후 이 창고는 쓸모를 잃었다. 시는 건물을 헐지 않고 외관을 살리되 내부를 개조해 2002년 '문화적 부두'로 이곳을 다시 열었다. 평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아카렌가소고는 멋지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로 북적북적했다.
아카렌가소고 동쪽에는 요코하마 국제여객터미널이 있다. 이곳의 디자인은 반대로 전위적일 정도로 현대적이다. 터미널의 옥상은 선과 면이 기하학적 비례미를 이루는 광장으로 꾸며져 있다. 여기선 신시가지를 이루는 미나토미라이 지구 마천루의 스카이라인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까지 이어주는 길은 1900년 건설된 철로를 개조해 만든 산책로다. 메이지 시대와 21세기가 요코하마의 공공 디자인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의 창조도시추진본부장 아키모토 야스유키씨는 요코하마의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살고 싶은 도시"라는 말을 반복했다. 경관으로 보이는 도시의 세련됨보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매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시가 내세우는 공공 디자인의 이념은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공간 ▦개방 공간과 녹지 ▦시민 커뮤니케이션 공간 등의 확보로 수렴된다. 요코하마시는 1971년 기획조정실에 도시디자인팀을 설치한 이래 본격적 디자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일관된 기조는 주민의 편의를 중심에 둔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1970년대 후반 도시의 기본 색채를 정할 때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 결정했다.
'BankART 1929' 요코하마의 활력 엔진
세계적인 도시 공공 디자인의 모델이 된 요코하마는 2000년대 들어 '문화예술 창조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우선 개항 후 1900년대 초 지어진 근대 건축물들을 젊은 예술인들을 위한 창작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개방했다. 아키모토 본부장은 이런 정책을 "하드웨어적인 부분에서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으로의 관심 이동"으로 설명했다. 이런 변화는 경관 디자인에서 시작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을 요코하마 경제 활성화의 동력으로 연결시키겠다는, 보다 큰 차원의 '디자인'에 의한 것이다.
새로운 시도의 중심에는 '뱅크아트(BankART) 1929'가 있다. 일종의 비영리기구(NPO)로 요코하마시의 창조도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엔진이다. 신시가지 형성 등으로 칸나이, 야마시타마치 등 구 중심가가 쇠락하자, 시는 2002년 '문화예술과 관광진흥에 의한 도심부 활성화 검토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논의 결과가 뱅크아트인데 이 이름은 시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던 옛 은행 건물을, 이 NPO가 거점으로 삼은 데서 유래했다. 1929는 다이이치(第一) 은행이 요코하마에 들어선 연도이고, 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인 뉴욕 현대미술관이 설립된 연도이기도 하다.
뱅크아트는 철저한 민간 조직이다. 시의 지원을 받지만 운영에는 일체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뱅크아트는 시가 제공한 건물을 젊은 아티스트들을 위한 스튜디오로 빌려주는 한편 각종 전시와 강좌 개최, 상점 및 카페 운영 등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 뱅크아트의 자체 수익과 이들이 끌어들이는 관광 수입 등을 더한 금액이 한 해 60억엔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행정당국이 지향점에 맞는 민간 기구를 사업 추진 주체로 선정한 뒤 고도의 자율성을 부여해 성공을 이끌어낸 사례라 할 수 있다.
뱅크아트 디렉터 토시호 미조하타씨는 "뱅크아트는 도시 건설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지만 완전히 개방되고 자유로운 곳"이라며 "사람들이 오가며 차를 마시고, 예술가들이 육성되고, 행위자와 지지자가 모두 생계를 꾸리고 살아가는 실험적인 장소"라고 설명했다.
부두에 위치한 뱅크아트의 메인 스튜디오를 찾아간 날도 앳돼 보이는 젊은 예술가들이 땀을 쏟고 있었다. 작업에 방해 될까, 그들 앞에선 토시호씨도 말을 아꼈다. "우리는 요코하마의 문화적 자산을 취해 현대의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가능성을 어떻게 개발하고 확장시킬지 결정하는 것이지요."
■ '창조도시' 꿈꾸는 지자체들 늘어…김해-디자인, 전주-전통 등 내세워
'창조도시'를 표방하는 국내 지방자치단체도 늘고 있다. 문화와 예술에 의한 도시 재생과 정체성 확립이 세계적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국내의 창조도시들은 아직 전시ㆍ공연 시설물을 설치하거나 관련 축제를 개최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적극적인 도시는 경남 김해시다. 김해시는 유네스코 창의도시(디자인 분야) 지정을 목표로 2020년까지 시 전체를 새롭게 디자인할 구상이다. 김해가 내세우는 정체성은 가야 문화로, 시는 고대의 역사와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2000년 국내 지자체 중 최초로 도시디자인과를 설치하고 세계빛도시연합(LUCI)에도 가입했지만, 아직 주민의 관심과 참여가 부족한 실정이다.
전북 전주시는 음식 문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을 내세운다. 음식과 함께 한옥, 전통음악, 한지 등의 자산을 바탕으로 창조도시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전주만의 문화적 특성으로 내세우기에는 차별성이 적고, 역시 시민들의 이해도와 참여도가 낮은 것이 장벽이다.
광주광역시는 민선 5기 시정의 구호를 '행복한 창조도시 광주'로 정했다. 기본 콘셉트는 '인본(人本) 디자인'이다. 그러나 모토에 비해 콘텐츠가 부족하다. 세부 정책은 공공시설물에 대한 시민 불편 해소, 건물과 간판 등의 디자인 개선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전도 창조도시를 표방하고 있지만 성격이 모호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전성시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오민근 박사는 "창조도시는 창의적 인재들이 모여 살고, 그 공간에서의 창의적 활동이 산업으로 연계될 수 있는 도시"라며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공간에 도입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당 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인터뷰/ 쿠니요시 도시정비국 수석조사역
요코하마시에는 1971년 도시디자인 담당팀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지금까지 같은 업무를 맡고 있는 공무원이 있다. 쿠니요시 나오유키(国吉直行ㆍ65) 도시정비국 수석조사역이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시의 디자인 방향에도 숱하게 바람이 불었는데, 쿠니요시 조사역의 존재로 인해 일관된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관성은 내 고집이 아니라 꾸준한 주민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쿠니요시 조사역은 40년 전 요코하마가 선구적으로 디자인의 중요성에 주목한 선택을 한 것을 생존 전략의 차원에서 설명했다. "요코하마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시도는 1965년부터 있었어요. 그때는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때라 모든 것이 도쿄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그대로 가다간 요코하마가 도쿄의 위성도시, 베드타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예요. 문화적 독립성이 사라지면 경제적 독자성도 사라지고 결국 다른 도시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求? 그래서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도시를 만들려는 정책이 시작된 거죠."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하던 그는 건물 하나하나보다 도시 전체를 디자인하는 데 흥미를 느꼈고, 그 흥미는 40년째 그를 사로잡고 있다. 요코하마시의 시대별 세밀도가 모두 그의 머릿속에 담겨 있지만 그는 성장주의에서 벗어난 2000년 이후의 '온리원(Only One) 도시' 전략을 강조했다.
"요코하마시의 번호판을 단 자동차만 봐도 '아, 요코하마에 살고 싶다' '요코하마로 여행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시의 디자인 정책에 모든 시민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식에 대해서만큼은 100%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과감한 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 겁니다."
쿠니요시 조사역은 공공 디자인에 관심을 쏟는 한국의 도시에도 그런 독자성을 가질것을 조언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도시만이 갖는 차별성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컨대 전주는 전통공예, 대구는 안경 디자인 등에 강점을 지닌 것으로 알아요. 그 독자성을 살리는 것이, 그리고 새로운 것과 옛 전통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도시의 매력을 만드는 길입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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