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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41> 6·25 참전 유엔군 화장장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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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41> 6·25 참전 유엔군 화장장 유적

입력
2010.07.13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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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5일은 이 땅에 6ㆍ25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었다. 이 전쟁은 3년 간 계속되면서 30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일단 휴전되었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각 2km씩 전체 폭 4km, 휴전선 155마일(248km)의 DMZ, 즉 비무장지대를 두고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이러한 대치기간도 벌써 57년 동안 계속되어왔고 남북이 하나 될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웠으며 급기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리전쟁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는 물론 우리의 강산이 초토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남과 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다.

이러한 비극은 그 원인이 일본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의 36년간 식민통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 2차대전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생겨난 부산물로 우리 민족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이 씨앗은 급기야 남과 북의 동족끼리 전쟁을 하게 만들었고 결국 우리는 남과 북을 달리하는 분단국가가 되었다. 뿐 아니라 전쟁의 상처는 전국 곳곳에 지금도 그 흔적이 아물지 않고 남아있다.

경기도 연천군 이산면 동이리 야산 계곡에 있는 6ㆍ25참전 유엔군 화장장 시설물의 잔재는 1993년 이우형 향토사학자(현 국방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가 처음 발견하고 1995년 연천향토사료집에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6ㆍ25전쟁의 흔적은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인의 관심 밖이었다. 2000년대 들어와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 6ㆍ25의 아픈 상처도 문화유산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많은 근대문화유산이 등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화장장 유산은 이 마을에서 농사짓고 있던 촌부의 증언에 의해 확인된 것이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연합군은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ㆍ28 서울 수복이 되고 난 후 통일의 문턱까지 갔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휴전이 진행되면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전개될 당시인 1952년, 벨기에군과 영국군이 이곳의 금굴산전투에 투입되면서 많은 유엔군의 희생이 따랐다. 전선에서 희생된 유엔군의 유해를 화장해서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영국군이 마련한 화장시설이었다. 희생된 장병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와 화장하기 전 반드시 예의를 갖추는 의식이 행해졌다. 이러한 사실을 생전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 마을에 살면서 전쟁 중에도 농사일을 했든 김태완(2005년 타계)씨였다. 물론 휴전 후에도 얼마 동안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주민들도 증언하고 있다.

현재 화장시설 가운데 굴뚝만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시멘트와 막돌을 이용해 허튼 쌓기로 7m 정도 높이의 굴뚝을 쌓았음을 알게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만 남아 6ㆍ25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 앞으로 일대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화장장에 따른 부속건물들의 규모를 밝히고 이를 토대로 복원한다면 훌륭한 안보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2008년 등록문화재 4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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