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한국현대사에서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해로 기록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긴 군부 독재 문화가 시효 상실의 단계를 맞이하고, 가열찬 민주화 흐름과 함께 민중문화의 꽃을 피웁니다. 젊은 연극인들도 예외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대학극 출신들이 많았던 가마골 소극장은 젊은 연극배우 스탭들이 가두투쟁을 나가느라 연습 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리와 술집에서 구호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배우들을 찾아내어 극장으로 끌고 와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뒤통수에 대고 돌팔매질을 해 대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연극 연습을 한다고 배우들을 끌고 가는거야! 그 젊은 배우들을 놓아 두라구!!" 뒤돌아 보니까 약관 20대 초반에 빼어난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대선배 시인이 소줏잔을 든 채 내게 질타를 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울컥한 감정으로 맞고함을 쳤습니다. "선배는 언제부터 참여시인이 되었소. 그렇게 술에 취해 어떻게 가두 투쟁을 나가겠소. 나는 가투에 나가는 시간에 연극 연습을 하겠소. 나는 연극인이니까 연극을 통해 세상과 만나겠소."
그해 여름 저는 연희단 거리패 창단 1주년 기념 공연으로 '산씻김'(이현화작 이윤택 연출)을 막 올렸습니다. 왜 하필 '산씻김'을 공연하려 하는가? '카덴자' '0.917' '불가불가' 등 이미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희곡을 공연하려 않고, 관객이 잘 모르는 작품을 선택하려 하는가? 이현화 선생은 좀 의아한 느낌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그냥…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이미 내 마음 속에는 이 작품을 구성만 남기고 디테일을 완전히 해체할 의도를 감추고 있었지요. '산씻김'은 씻김굿을 소재로 한 현대극이었고, 그 동안 굿을 어떻게 현대극 양식으로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탐색 중이던 저로서는 최적의 텍스트였습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여성이 타이어 펑크가 나서 고속도로 인근 민가에 전화 걸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민가는 바로 굿당이었고, 등장한 정체물명의 여사제와 소녀무당들은 산 자를 제물로 하여 한판 산씻김 굿을 벌입니다. 여성은 발가벗기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일상의 시간과 다른 잔혹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현화 선생의 잔혹구성은 바퀴벌레까지 동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바퀴벌레까지 등장하는 디테일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게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던져져서 잔혹한 체험을 하게 된다는 극 구성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이현화 선생의 희곡을 해체하고 저의 연출의도대로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줄 안 되는 대사만 남기고, 지문은 모두 삭제합니다. 대신 제가 준비했던 굿 퍼포먼스로 채워집니다.
87년 6월 25일부터 7월 25일까지 가마골소극장에서 한달 동안 공연된 이 작품은 비수기인 한 여름에 대박이 터집니다. 여성의 정체성이 무자비하게 해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객석에서는 비명이 터지고 숨막히는 긴장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가마골소극장 공연이 끝나면서 흥미로운 제안을 받습니다. 자유평등연구소란 운동권 단체에서 대동제 공연으로 초청 기획됩니다. 87년 8월 1일~3일 사흘간 해운대 송림공원에서 야외 공연 형태로 공연된 '산씻김'은 한 마디로 생생한 게릴라전이었습니다.
공연 전날 무대를 세우는데 정체 불명의 건장한 남성이 쇠파이프를 들고 와 가설 천막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있었습니다. 자유평등연구소 사람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폭력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가설 천막을 다 때려 부순 남성은 이제 무대를 부수러 왔습니다. 그러나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은 이 이유 없는 폭력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남성을 붙들고, 배우 최성락군이 남성의 면상을 박치기로 들이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쇠파이프를 들고 밤새 무대를 지켰습니다.
정작 문제는 마지막 공연 중에 터졌습니다. 공연이 시작된 지 십분 만에 경찰로부터 공연 중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주최측보다 더 극렬한 운동권 단체가 대동굿이 끝날 즈음 무대에 올라가 관객들을 이끌고 가두투쟁을 벌이려 한 거지요. 어느새 백골단 2개 중대가 대동제 행사장을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내려와 대동제 기획을 책임지고 있던 오수연씨는 인명 피해를 우려하여 공연 중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연을 중지할 수 없었습니다. 배우들이 실제 상황이 두려워 공연을 포기한다면 그건 수치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저는 공연을 계속 진행시키면서 긴급 연출 지시를 내립니다. 당시 조명을 맡고 있던 김광보군에게 공연이 마지막 단계에 이를 때 롱 팔로우 한 대만 불을 켜서 저 멀리 공원 너머로 비추고 무대 조명을 모두 끄라고 지시합니다. 배우 박은홍군에게는 불이 꺼지고 조명을 멀리 비출 때 꽹과리를 치며 혼자 달려 나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도주할 테니 알아서 무사히 돌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수연씨에게 무대 뒤로 미니 버스를 대기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이 모든 엑스더스-탈출의 구상과 지시가 하달되었습니다. 이윽고 무당역을 맡았던 배미향양이 큰 대나무를 흔들며 마지막 구호를 외치는 순간 송림공원은 암흑천지가 되고, 희미한 불빛을 따라 박은홍군이 꽹과리를 치며 달아나고, 관객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를 틈타 우리는 조용히 무대 뒤로 빠져 나가 미니 버스를 탔습니다. 문화 운동가 오수연씨가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안녕-" 저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버스를 출발시켰습니다.
94년에 오수연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운동권 여성에서 소설가로 변신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신문에 글을 보내고, '팔레스타인의 다리'란 민간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여전히 타고난 운동가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희단 거리패의 '산씻김'은 시위나 데모를 위한 연극은 아니었습니다. 88년 바탕골소극장에서 연희단 거리패의 첫 서울 나들이 공연을 했고, 1990년 실험극장 초청공연을 거쳐 일본 타이니 알리스 페스티벌에 초청받습니다. 일본의 평론가 센다 아끼히코씨는 아사히신문 문화면에 큰 사진과 함께 '산씻김' 기사를 내 보냅니다. 그리고 1992년 타이니 알리스에서 일본 오사까 만세극단 작품과 연희단거리패의 '산씻김'을 페스티벌 1O년 결산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일본에서 연출가로 초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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