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빚 두려워 미뤘던 내 집 마련 꿈이 기약없는 꿈 될 줄이야"
10년 전인 2000년 봄. 중견 보험회사에 다니던 김성곤(39ㆍ가명)씨는 서울 광진구 중곡동 반지하 전세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전세금 2,100만원. 그래도 큰 걱정은 없었다. 당시 김씨와 학원강사이던 아내의 월 수입은 350만원 가량.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는 아니라도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4년 뒤 아이가 생기면서 습하고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서 벗어나기로 했지만, 당장 집을 사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당시 20평형대 집을 사려면 최소 5,000만원 이상 대출을 받아야 됐죠. 아이 때문에 아내도 일을 그만뒀는데 대출금을 다달이 갚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전세금 4,700만원에 인근 다가구주택 2층으로 옮겼다. 비록 내 집 마련의 꿈은 뒤로 미뤘지만, 반지하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만족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집을 살 때마다 번번이 고심했지만, 그 때마다 내린 결론 역시 "조금만 더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조금만'은 곧 '기약 없이'로 바뀌었다. 신도시 개발 등으로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며 1억원 남짓하던 아파트가 순식간에 3억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김씨는 "부동산중개업소를 지날 때마다 멍하니 시세표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다. 지금 김씨는 전세금 1억3,000만원에 서울 노원구 중계동 20평형대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그 때 집을 샀더라면…" 세입자들이라면 누구나 몇 번쯤 이런 후회를 하곤 한다. 내 집 마련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극빈층이야 논외라 쳐도, 빚이 두려워 내 집 마련을 미뤄왔던 이들에겐 우리 사회의 '부동산 불패 신화'가 곧 좌절감이 됐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102㎡(31평형) 가격은 2001년 3억원에도 채 못 미쳤다. 한 때 10억원을 훌쩍 넘었다가 지금은 많이 떨어졌다지만 그래도 9억원이 넘는 수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해도 5억원 이상 더 뛴 셈이다.
이러니 우리 사회에서 '집'은 소득 양극화보다 더 극심한 자산 양극화의 주범일 수밖에 없다. 똑 같은 돈을 번다고 해도 집이 있느냐 없느냐, 또 집이 몇 채가 있느냐에 따라 빈부가 확연히 갈라지고 시간이 갈수록 그 격차는 더 벌어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중ㆍ고령자 가구(가구주 연령 50세 이상)의 자산분포 현황을 분석한 결과, 상위 3분의 1 계층에 순자산(총자산-총부채)의 82.2%, 부동산자산의 79.2%가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위 10%가 순자산(49.3%)과 부동산자산(49.0%)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2000년 남편이 지방(경북 안동)에서 서울로 발령나는 바람에 전세 생활을 시작한 정미순(45ㆍ가명)씨. 몇 년 있으면 다시 지방 발령이 날거라 생각하고 집을 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전세금이 싼 곳만 찾다 보니 잠실 주공4단지 17평형(6,500만원), 강동구 둔촌동 18평형(9,500만원), 같은 단지 31평형(1억7,500만원) 등 낡고 노후한 재건축 아파트만 전전하게 됐다. "당초 집을 산 사람들은 그 아파트 월세 놓고 한 달에 200만원씩 받는다고 하대요. 낡은 아파트라 물도 새고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지만 더 이상 이사 다닐 능력도 없어요. 재건축 안 되기만 바랄 뿐이죠." 그의 말 속엔 짙은 박탈감이 배어있었다.
김성만(52ㆍ가명), 한승희(45ㆍ가명)씨 부부도 20년 넘게 전세의 덫에서 허덕이고 있다. 자녀 3명과 함께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전세금 8,500만원 짜리 서울 송파구 석촌동 다세대주택 20평형. 결혼 7년 만인 1995년 이 지역 인근 26평형 다세대주택에 전세금 8,000만원에 입주를 했으니,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질친 것이다. 건설 중장비 관리직인 김씨와 유치원 교사인 한씨가 벌어들이는 수입(월 400만원)이 결코 적지 않지만, 세 자녀 교육비에 생활비에 목돈을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한씨는 "90년대 중후반에 대부분 집을 사는 분위기였는데 그 때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사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요즘 집값이 급락한다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우성에 한씨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이 참에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부동산 거품이 확 꺼졌으면 좋겠어요. 집이 빈부를 가르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이영태기자 ytlee@hk.co.kr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가계빚 60%이상이 주택담보대출
서울 상도동에 사는 조미례(49ㆍ가명)씨는 요즘 좌불안석이다. 그는 부동산 광풍이 일던 2006년7월, 이 곳에 114㎡ 아파트를 8억7,000만원에 구입했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무리를 해서 2억8,500만원 대출을 끼고 산 집이었다. 3년 정도 살다가 팔아서 차익을 남길 요량이었고, 그래서 대출도 짧게(3년) 받았다.
당초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에 0.9%포인트가 붙었던 대출 가산금리는 지금 2.7%포인트로 확 뛰었다. 집을 팔겠다고 내놨으나 좀처럼 팔리지 않아 1년 단위로 대출만기를 연장하고 있는 처지. 한 때 80만원 밑으로 떨어졌던 월 이자 부담은 요즘 122만원으로 불어났다.
샐러리맨이나 자영업자가 빚을 내지 않고는 도저히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사회. "대출을 통한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잘 활용할수록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건 거의 철칙이나 다름 없었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나 총부채상환비율(DTI)처럼 과도한 레버리지를 제한하는 금융 규제들이 가장 효과적인 부동산 대책으로 평가되는 현실이, 레버리지의 투기 효과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절반 가량(48.6%)을 소득 상위 20% 계층이 보유하고 있다는 통계(한국노동연구원) 또한 대출을 통한 주택 구입이 치부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4월말 현재 금융권 주택담보대출은 336조원. 전체 가계대출(558조원)의 60%가 넘는다. 빚을 내는 이유의 절반 이상은 거주 목적이든, 투기 목적이든 집을 사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앞으로다. 금리 인상 행진이 시작되면서 상당기간 부동산 경기 회복이 쉽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이 우세한 상황. 지금까지야 집값이 떨어진다고 해도 저금리 덕에 그럭저럭 버텨 왔지만, 앞으로 금리 인상이 지속된다면 뒤늦게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이들은 헐값에라도 집을 내던져야 하는 벼랑 끝 상황이 올 수도 있다. 3년 전 경기 용인에 집을 샀다가 가격 하락에 속앓이를 하고 있는 정희영(40)씨는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빚을 내서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는데 결국 이도 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며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진 격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 자산 양극화 해법은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2005년)를 보면 6.6%의 가구가 전체 주택의 36%를 보유하고 있다. 또 2006년에 발표된 토지소유현황에 따르면 전국 인구 1%가 소유한 토지는 전국 개인 소유 토지의 56.7%에 이른다. 자산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동산이 이처럼 상위 극소수 계층에 편중된 탓에 부동산가격 상승은 자산격차확대(자산양극화)로 이어지는 게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산 양극화 해소는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 선대인 김광수연구소 부소장은 "2006년말 주택을 살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집을 거의 다 구입을 했고 수요는 현재 고갈된 상태"라며 "부동산 시장이 지금 냉각됐다고 해서 더 큰 빚을 내서 집을 사도록 유도하는 것은 위험 천만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지금의 부동산 시장 위축은 과열됐던 부동산 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인 만큼 '부동산 시장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섣불리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사실 아파트 보다는 토지 쪽의 자산편중이 더 심하다. 때문에 주택시장에 대한 규제와 정책이 토지시장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는 "주택가격의 하향 안정세와는 반대로 전국의 지가는 올 들어 0.7% 상승하는 등 2000년 이래 평균 가격이 38%이상 올랐다"며 "높은 토지가격은 보상가격을 끌어올리고, 높은 지가는 다시 분양가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만큼 '집값은 떨어져도 땅값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변 교수는 "개발사업이 진행되어 지가가 상승하게 되면 그로 인한 지가상승분을 토지소유주가 독차지할 수 있는 한 지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며 "개발이익의 환수와 토지보상제도의 근본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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