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좌는 광주(廣州)이씨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할아버지다. 그는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약사발을 가지고 간 죄로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죽었다. 약사발을 가져가던 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부인 양주(楊州)조씨가 "조정에서 폐비를 논하더니 결과가 어찌 되었소?" 하니, 이세좌가 "오늘 이미 사약을 내렸고 내가 그 봉약관(奉藥官)이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조씨는 놀라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들이 씨가 마르겠구나! 어머니가 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어찌 다른 날 보복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이세좌와 연산군의 악연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496년(연산군 2) 이세좌와 그의 동생 이세걸(李世傑)은 연산군이 폐비의 신주와 사당을 만들려 하자 성종의 유교(遺敎)를 어기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503년(연산군 9) 9월 11일 인정전(仁政殿)에서 벌어진 양로연(養老宴)에서 이세좌는 연산군이 따라주는 회배(回盃)를 임금의 옷에 엎질렀다. 연산군이 "예조판서 이세좌가 잔을 드린 뒤 회배를 내릴 때 내가 잔대를 잡았는데, 반이 넘게 엎질러 내 옷까지 적셨으니, 국문하도록 하라!"고 했다. 승정원에서 추국(推鞫)하라는 전지(傳旨)를 써서 올리니 "그 안에 '소리가 나도록 엎질러 어의까지 적셨다'는 등의 말을 더 써 넣느라!"고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관직을 바꾸라고 했다가, 전라도 무안현(茂安縣)에 부처(付處)하면서 "이세좌가 배소(配所)에 이르는 날짜를 자세히 아뢰라! 거느리고 가는 관원이 사정이 없지 않아 반드시 독촉해 가지 않을 것이니, 서울을 떠나는 날짜도 함께 자세히 아뢰라! 혹시라도 지체해 늦는 일이 있으면 중한 죄로 논하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9월 22일 이세좌를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4) 1월 11일에 연산군은 "이세좌는 죄를 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지금 놓아주는 것이 빠를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학식이 있고, 또한 이미 스스로 징계했을 것이며, 또 은혜를 반포하는 때이므로 특별히 놓아준다"고 하고 풀어주었다. 이세좌는 3월 3일 사면되어 대궐 단봉문(丹鳳門) 앞에서 사은했다. 연산군은 술잔을 내리면서 이 술잔은 네가 전날 쏟은 것이라 했다. 그러나 홍귀달(洪貴達)이 자기 손녀딸을 연산군의 궁녀로 들이라는 명을 어기자 이것은 자신에게 술잔을 엎지른 이세좌를 불과 4개월 만에 풀어준 때문이라 하면서 그를 강원도 평해군으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거제도로 귀양보냈다.
그런데 4월 4일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이세좌가 폐비 윤씨에게 약사발을 가지고 갔던 것이 탄로되어 거제도로 가는 도중에 곤양군 양포역에서 자살하게 했다. 아들 4형제와 동생 이세걸, 사촌 이세광(李世匡), 종손자 이수공(李守恭) 등 여러 족친들이 죽거나 귀양갔다. 이들은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에야 신원되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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