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정(休靜) 서산대사(일명 청허대사ㆍ1520~1604)가 400여 년 만에 환생한 듯한 분위기다, 여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 시대 우리 정치의 표상과 정치인의 자세에 일침을 가하는 경구로 서산대사가 읊었다는 선시를 앞다퉈 소개해서다. 휴정은 대부분 알듯이 유정(惟政) 사명대사의 스승으로, 임진왜란 때 묘향산 등지에서 승병을 일으켜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웠고 선종과 교종의 일원화를 이끈 조선 중기의 고승이다. 묘하게도 그는 얼마 전 주지선임 갈등으로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던 봉은사에서 승과시를 치러 등과했으며 나중에 이곳 주지를 지낸 인연도 있다.
■ 얘기는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먼저 꺼냈다. 세종시 수정안이 결국 본회의 표결로 넘어간 지난달 말 그는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휘호에 서산대사가 애송하던 선시(禪詩) '답설야'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이라는 이 선시를 풀어 "눈 덮인 들판을 지날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라고 직접 낭독했다. "백범 선생도 즐겨 쓴 이 휘호에 우리의 길이 있다"면서.
■ 바통은 대통령 실장에 내정된 임태희 노동부 장관이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직 사퇴문제로 한때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내정 직후 결심의 단편을 서산대사가 입적 때 읊었다는 선시로 표현했다.'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이 그것인데 '삶은 한 조각 구름의 일어남이고 죽음은 구름의 사라짐이다, 뜬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으니 살고 죽고 오고 감 또한 그와 같도다'로 풀이된다. 청년 시절 잠시 방황하던 그를 잡아주고 삶의 이정표가 된 글귀란다.
■ 박 원내대표와 임 내정자가 서산대사의 말에 의탁한 정치적 맥락은 분명 다르다. 전자는 집안 단속이고 후자는 자기 다짐일 것이다. 하지만 서로 통하는 뜻도 찾을 수 있다. 작고 약삭빠른 일에 집착해 끙끙 앓지 말고 옳고 큰 길을 가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메시지 말이다. 어지러운 정치판에 자신을 불러낸 것에 화낼 법한 서산대사도 이런 맥락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부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보다 큰 책임은 임 내정자에게 있고 시험대는 권력을 뜬 구름처럼 여기는 새 사람들로 청와대를 꾸리는 일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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