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희생장병 넋 기리는 한국의 모습, 고국 친구들에게 전할 것"
"할아버지 가슴 속에 맺힌 전쟁의 한을 우리는 굳건한 평화로 꽃피워야죠."
6ㆍ25전쟁 참전 용사의 손자 손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가보훈처 주최로 1일부터 일주일간 열린 유엔 참전국 청소년 평화 캠프를 통해서다. 한국 대학생 20명 등 참전 22개국의 대학생 145명이 참가해 밤새워 토론하고 상흔이 남아 있는 이 땅 곳곳을 둘러보며 전쟁의 의미를 되새겼다. 국적은 다르지만 21세 동갑내기 참가자인 한국인 김한예(여)씨와 네덜란드인 닐스 데캇씨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 봤다.
김씨는 두 세대 전에 이 땅에서 벌어진 6ㆍ25전쟁이 그리 낯설지 않다. 참전 용사인 두 분의 할아버지로부터 어려서부터 전쟁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덕분이다. 할아버지는 짬만 나면 손녀를 무릎에 뉘어 놓고 탱크며, 비행기며 온갖 전쟁 무용담을 쉴새 없이 늘어 놓곤 하셨다. "그러다 곤히 잠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남들은 잊혀진 전쟁이라지만 제게는 너무도 생생하고 소중한 추억이었지요. 이번 캠프도 할아버지가 알려 주셨어요."
외할아버지는 6ㆍ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함경북도 흥남시에서 공대에 다니셨다. 원래 북한에서는 대학생들을 우대하며 군 입대도 면제해 줬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대학생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죄다 끌고 갔다. "대학생들도 강제 노동시킨다는 말이 파다했대요. 그때 할아버지는 21세 꽃다운 나이셨죠. 징용을 피해 가족들은 함경남도 함흥시에 남겨 두고 흥남철수작전 때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셨지요. 남한에서 군에 자원했고, 당시 미군이 공대 출신 젊은이들을 한참 수소문 할 때여서 미군으로 참전하셨어요. 하지만 가족을 끝내 만나지 못하셨죠."
벽안의 미국인이었던 고모할아버지는 19세 때 참전했다. 6ㆍ25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강원 홍천군 가리산전투에서 적군에 포로로 잡혔다. 풀려나기까지 한참 고문을 당한 탓에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나이 들어 산소호흡기를 달고 사실 정도로 심각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꼭 한국에 돌아가서 발전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고모가 대신 한국에 와서 비디오로 이곳 저곳의 모습을 촬영해 간 화면을 보고는 펑펑 우시기도 했어요."
데캇씨의 할아버지는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손자에게 별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게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셨던 것 같아요. 참전이 자랑스럽지만 그렇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니 어린 손자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나 봐요."
오히려 데캇씨 스스로 6ㆍ25전쟁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할아버지가 쓰신 전쟁의 후유증에 관한 논문을 통해서다.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도 처음 알았다. 그러다가 몇 년 전 TV에서 우연히 할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2차대전과 6ㆍ25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중간에 할아버지의 인터뷰가 나왔다. "전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체스의 말처럼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면 왼쪽으로 가고, 싸우라면 싸우면서 지쳐 갔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친구도 잃으셨죠. 그리고는 전쟁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을 주는지 말씀하시다가 벌컥 우시더라고요. 저도 따라 울었죠.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때 방송 내용이 담긴 CD를 늘 갖고 다녀요."
둘은 입을 모아 부산에 있는 유엔참전공원을 방문한 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외국 학생들의 경건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며 말을 꺼냈다. "사실 날이 무지 더웠잖아요. 그런데도 다들 어디서 가져왔는지 정장을 차려 입고, 심지어 터키 친구들은 머리에 히잡까지 둘렀더라고요. 참전 용사들의 희생을 마음 속으로 어떻게 대하는지 엿볼 수 있었죠. 청바지를 입은 한국 학생들이 부끄러울 정도였어요."
데캇씨도 거들었다. "네덜란드에서 6ㆍ25전쟁은 역사시간에 훑어 지나가는 잊혀진 전쟁이에요. 몇만 명이 전사했다는 등 숫자로만 대충 알고 말죠. 하지만 공원 벽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수많은 전사자의 이름을 직접 와서 보니 정말 얼마나 중요하고 피 말리는 전쟁이었는지 실감이 나더라고요. 공원에서 통역으로 자원봉사하신 참전 용사 할아버지의 구구절절한 얘기도 잊을 수 없어요."
그래도 서로 국적이 다른데 의견 차이로 많이 부딪치지는 않았을까. 그러자 김씨는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처음에는 물론 어색했지요. 하지만 외국 친구들의 할아버지도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셨다는 말을 듣다 보니 우리가 각자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이 강해지더라고요. 전쟁을 넘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토론도 많이 했어요. 한 번 말을 꺼내면 이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술 얘기를 풀어가죠. 참 신기했어요. 60년 전 할아버지들도 함께 전투를 치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데캇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전쟁을 얘기하면서 제가 한국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질문한 건 통일에 대한 것이었어요. 정말 통일을 원하는지, 그렇다면 독일의 사례가 보여 주듯 경제적 부담이 클 텐데 말이죠. 제 나라에서는 분단이라는 상황이 너무나 낯설지만 한국에 와 보니 그게 현실이더라고요."
캠프를 마치고 돌아가면 주변의 친구들에게 할 말이 많을 것 같다고 묻자 김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전쟁기념관, 부산유엔공원 등 거기에 있다는 건 알지만 선뜻 발길이 닿지 않잖아요. 하지만 실제 가 보니 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꼭 와 보면 좋겠더라고요. 관리도 잘 돼 있어요. 한번쯤 그곳에서 눈을 감고 참전 용사께 고맙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해요.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니까요."
데캇씨도 고국의 친구들에게 전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6ㆍ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유엔이 하나가 돼서 행동에 나서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 수 있는지, 그리고 한국이 60년 전 참전 용사들의 희생에 대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알려 줄 거에요."
둘의 꿈은 뭘까. "국제학교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어요. 물론 평화의 소중함과 전쟁에서 많은 나라들이 어떻게 하나로 뭉쳤는지도 함께 설명해 줘야겠죠.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어린 아이들도 제대로 알고 느꼈으면 해요."(김씨)
"저 하나의 힘은 작겠지만 하나 둘 모이면 크잖아요. 우리의 할아버지들도 그러셨고요. 건축학도라 첨성대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을 오가며 문화도 배우고 평화의 가교가 되도록 노력할거에요."(데캇씨)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 볼 넓은 군화 원했던 터키軍등 나라별 음식·피복 달라 '골머리'
6ㆍ25전쟁에는 16개국의 전투 병력과 5개국의 의료지원단 등 200만명의 유엔군이 참전했다. 이들은 한국의 유엔군 보충대에서 미군 교리에 따라 훈련을 마친 뒤 언어와 관습 등을 고려해 주한미군 사단에 대대 단위로 배속됐다.
병참 지원은 전적으로 미군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전쟁통이다 보니 문화적 특성에 따른 참전 군인들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음식과 피복이 항상 골칫거리였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 장병들은 돼지고기를 거부했고, 힌두교 국가인 인도 장병들은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군인들은 빵과 감자를 선호했지만 그리스 군인들은 콩과 고구마를 싫어한 대신, 야채와 올리브기름을 추가로 원했다. 태국 군인들은 미군이 지급하던 통조림(레이션)이 생소해 쌀과 매운 고추장을 요구했고, 스테이크를 배급하면 쌀과 같이 끓여먹는 일도 있었다.
프랑스 영국 군인들은 자국의 포도주와 위스키를 요구했지만 미군은 술 지급을 금지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터키 그리스 군인들은 볼이 넓은 군화가 필요했던 반면, 태국 필리핀 군인들에게는 몸에 맞는 작은 군복이 절실했다. 태국 인도처럼 평지와 더운 지방에서 온 장병들은 한국의 산악 지대와 추운 겨울 날씨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한편 6ㆍ25전쟁에는 덴마크의 유트란디아호라는 병원선도 참전했다. 356개의 침상과 4개의 병실에 수술실, 엑스선 촬영, 치과 시설 등을 갖춘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해상 종합병원으로 1951년 3월부터 999일간 4,981면의 참전 군인들과 6,000여명의 한국의 민간인들을 돌보고 치료했다.
시설이 좋고 친절한 것으로 소문이 나면서 일부 군인들은 전투에 앞서 군번줄이나 군복 주머니에 '부상시 유트란디아 후송 요망'이라는 문구를 적어 놓기도 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이승만 대통령이 치과 치료를 받는가 하면 유트란디아의 의료진은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의술 발전의 촉매제가 됐다. 유엔이 1958년 한국부흥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을지로에 지은 메디컬센터라는 종합병원을 통해서다. 현 국립의료원의 전신으로 덴마크는 병원을 10년간 운영한 뒤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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