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유를 전기로, 바닷물을 식수로… 현대판 오아시스 우리 손으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산업화를 적극 추진 중인 중동지역의 최대 고민은 전기와 식수다. 당장 에어컨이 없으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고 도시화가 진척될수록 전력 수요는 급증한다. 또 예전부터 오아시스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을 만큼 물은 귀하디 귀한 보물이다. 때문에 숨을 턱턱 가로막는 사막의 열풍(熱風)을 뚫고 원유를 전기로 바꿔 놓고, 바닷물을 음용수로 변신시키는 두산중공업과 현대중공업의 '마법'에 현지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있다.
#1. 6월 초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의 외곽에 위치한 제벨알리M 프로젝트 현장. 본격적인 무더위는 아직 멀었다는데 한낮 기온은 45~46도를 넘나든다. 이런 폭염 속에서도 척박한 사막 위에서 전기를 생산해 내느라 4,000여명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현장 곳곳에는 두산중공업 로고가 선명한 입간판이 자리잡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제벨알리M 프로젝트는 총 발전용량이 2,000㎿에 달하는 대규모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계획이다. 두바이 시민 500만명 전체의 전기 사용량이 9,000㎿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007년 가을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당시 필요한 자재들을 쌓아놓는 데에만 99만㎡(약 30만평)의 부지가 필요했을 정도다.
오전 10시께 안전모를 착용하고 현장을 둘러봤다. 찌는 듯한 더위에 습도까지 높아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전체 부지가 36만4,000㎡(약 11만평)로 발전용량에 비해 규모가 적다 보니 전체 공장이 오밀조밀해 체감온도는 더 높은 듯했다. 내년 11월 완공 예정이라 웬만한 설비는 이미 갖춰진 상태. "대도시 근방이어서 적은 부지 안에 압축적으로 시공을 하고 있고 이 때문에 공정과 설계 자체에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임창호 기계부장)고 한다.
현장 근로자의 대부분은 인도와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에서 온 사람들이다. 1970~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오일머니를 위해 이 곳을 찾았던 것과 비슷하다. 나춘남 관리부장은 "10여개국 출신의 근로자가 함께 일하는 곳이라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며 "최근 달성한 2,000만시간 무재해 기록은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2,000만시간은 1,000명의 근로자가 하루 10시간씩 6년5개월간 일해야 하는 시간이다.
#2. 한 때 중동지역 상권의 중심지였던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동쪽 해안선을 타고 30여분간 사막길을 달리자 푸른색 삼각형의 현대중공업 로고가 선명하다. 17억달러 규모의 바레인 최대 민자 발전ㆍ담수플랜트인 알두르 공사 현장이다. 새벽 5시인데도 아침식사가 한창이었다. 열사의 땅 중동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알두르 현장은 총 발전용량 1,245㎿급 복합화력발전소와 1일 생산규모 22만톤급 담수플랜트로 나뉘어 있다. 발전용량 면에선 바레인 전체 소요량의 30%에 달한다. 화력 발전소는 설계에서부터 제작ㆍ공급ㆍ설치ㆍ시운전 등을 일괄 수행하는 EPC방식으로 건설되고 있는데, 담수플랜트 공사의 경우 현대중공업은 이번에 처음으로 필터를 이용한 역삼투압(RO) 방식을 적용했다.
직원들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현장을 둘러보는데 근로자들이 '국민 체조' 음악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고 있었다. 일반 공사에 비해 무거운 설비를 옮기거나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등 위험도가 매우 높은 만큼 근로자들이 긴장을 풀고 작업을 시작하는 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발전소는 내년 6월 완공이 목표지만 1,2호기가 이미 시험운전에 들어갔을 만큼 진척이 빠르다. "전체 설비의 70% 이상, 금액면에선 95% 가량이 국산 설비"(이규식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한다.
공장 부지 바깥에 자그마한 임시부두가 보였다. 해상 배관공사용 준설로를 보강해 바지선이 오갈 수 있게 한 곳이다. 바레인 항구에서 현장까지 60㎞가 넘는 길을 육상으로 운송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아예 자체적으로 부두를 만든 것이다. 운송시간과 비용 등을 감안할 때 300만달러 정도의 공사비 절감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 현장 관계자는 "공기 단축에 놀란 발주처 직원들이 임시부두를 보고는 감탄사를 연발하더라"고 전했다.
■ 범한판토스의 이색 전략/ "두바이물류 잡아야 세계시장으로 도약"
세계 유수의 물류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둥지를 틀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항. 경제자유구역(FTZ) 내로 들어서니 거대한 물류창고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차로 20여분을 달려 뿌연 흙먼지가 날리는 FTZ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더니 별다른 간판도 없는 파란색 지붕의 대형 물류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물류전문기업 범한판토스가 1,000㎡를 빌려 쓰고 있는 곳이다.
범한판토스는 지난해 극심한 경기침체 속에서도 2조2,000억원이 넘는 글로벌 매출을 달성한 회사다. 그런데 중동 경제의 중심지인 두바이에 겨우 1,000 ㎡의 물류창고를 임대해서 쓰고 있는 이유는 뭘까.
지난 3년간 오만법인장을 지낸 뒤 지금은 아부다비법인 개설을 준비중인 최삼영 팀장은 "중동 현지에서 새로운 물류시장을 창출해내기 위한 기초를 닦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면 으레 해당 물류를 대행하는 식으로 해외에 진출해온 국내 물류업계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물류창고의 규모보다는 현지 업체들의 물류를 대행하거나 국제복합운송업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최 팀장은 GS건설의 루와이스(UAE) 그린 디젤 프로젝트와 소하르(오만) 플랜트 공사의 물류를 담당하면서 오만 현지업체가 생산한 화학제품을 인근 중동국가로 실어 나르는 현지 물류를 수주했었다. 규모는 수 만달러에 불과했지만 범한판토스 창사 이래 첫 해외 현지물류였다.
최 팀장은 "UAE나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는 등 지금까지와는 달리 중동국가들도 제조업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며 "중동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바이의 물류를 장악하는 것이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다시 쓰는 중동 신화/ 전자제품=코리아, 플랜트도 코리아
최근 중동경제다이제스트(MEED)는 한국 기업들이 지난해 총 360억달러(약 44조원) 상당의 건설 계약을 따냈다고 보도했다. 이 지역 전체 계약액의 4분의 1에 달하는 액수로 2003년(수주액 23억달러)에 비해 15배를 웃도는 규모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우리 기업들의 중동 진출이 활발하다. 1970~80년대에 이은 '제2의 중동 진출 붐'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지난해 이 지역의 경제 중심지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가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미 상당수 우리 기업은 수도인 아부다비로 근거지를 옮겨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UAE를 비롯,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 등지에서 현대중공업과 두산중공업 현대건설 GS건설 등이 대규모 플랜트 공사를 싹쓸이하다시피 하고 있고,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현지법인을 통해 '전자제품=코리아'라는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의 강점은 북미ㆍ유럽권의 선진국에 비해서는 가격 경쟁력, 중국ㆍ인도에 비해서는 높은 기술력이다. 특히 현지 근로자들과 협력 강화, 현지 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과 교육 지원 등을 통해 안정적으로 현지화에 성공한 경우도 많다. 올 초 UAE로부터 40억달러 규모의 원전을 수주한 것도 우리 기업들의 중동 진출에 힘을 싣고 있다.
물론 위험성도 상존한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들끼리의 출혈 경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지에 진출한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중동지역에 진출한 우리나라 건설사만 55개가 넘는다"며 "80년대 후반처럼 우리 기업들끼리 수주 경쟁을 벌이다 결국 저가 수주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핵심 기술력의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우리 기업들이 초고층 빌딩이나 대형 플랜트 공사를 수주할 때 설계와 시운전 등을 외국기업에 맡길 것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한 중공업 업체 관계자는 "GE는 발전소 터빈에 부착하는 대형날개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매년 수 억달러를 번다"며 "우리 기업들의 수주금액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두바이(UAE)ㆍ마나마(바레인)=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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