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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꽃, 자비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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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꽃, 자비의 이름

입력
2010.07.1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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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 현관문을 열 때 늘 발밑을 조심한다. 시멘트 금간 곳에 괭이밥 노란 꽃이 아직 피어 그 친구 밟을까 싶어 큰 몸이 움찔움찔한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이 있고 낮에 피는 낮달맞이꽃이 있다. 수돗가에 낮달맞이꽃이 무리지어 핀 지도 오래다.

키 작고 꽃만 큰 꽃, 외래종이지만 꽃말이 '무언의 사랑'이라는 것이 좋아 세수를 하다 맑은 물을 받아 뿌려준다. 꽃 속에 실핏줄처럼 드러난 촘촘한 세로줄이 말없이 사랑하는 것이 저토록 힘든 자세인가 싶어 공감한다. 텃밭에는 노란 오이꽃이 일고 있다.

꽃이 지고나면 푸른 오이가 주렁주렁 달릴 것이다. 생오이 생각에 침이 괸다. 담장을 타고 노란 수세미꽃도 일었다. 이제는 '수세미'를 만들어 쓰지 않지만 폭신폭신한 자연의 추억이 달리는 것이 즐겁다. 나팔꽃과 비슷한 메꽃, 슬픈 꽃 개망초꽃이 한창이다. 감꽃이 언제 피었다 졌는지 감나무엔 작은 감들이 단단하게 맺혀 또록또록하다. 이웃집 담장 밖으로 석류꽃이 피었다 지고 진홍빛 석류열매가 맺히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집에 능소화는 올해도 주인을 기다리며 피었다. 개울가에 심어진 자귀나무도 층층 사랑의 꽃을 피웠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리고 무더위에 꼼짝하기도 싫은데 여름 꽃은 핀다. 불볕 햇볕과 싸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은현리에서 여름 꽃은 대자대비와 같은 이름이어서 공손하게 합장을 올린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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