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원은 보치아 국가대표다. 하지만 우리 집 사정으로 보치아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홈통이란 기구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비싸서 부모님이 사주기 힘들기 때문이다.'
5월 한국장애인부모회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이름도 생소한 보치아란 종목의 국가대표를 꿈꾸는 뇌병변1급 장애인 구혜미(24)씨가 보낸 것이다.
그는 신문 귀퉁이에 난 '장애인가정 소원 들어주기' 행사 소식을 접하고 직접 사연을 써 응모했다. 약값이나 학원비 등 보다 현실적이거나 가족여행 등 값비싼 소원을 담은 사연들도 있었지만, 지난달 구씨는 30대 1의 경쟁을 뚫었다.
8일은 구씨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다. 이날 구씨 가족이 사는 경기 하남시의 작은 임대아파트엔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다는 구씨는 홈통이 도착하자 그간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산 공 세트를 가져 나왔다. 홈통과 공은 언뜻 커다란 장난감처럼 보였다. 구씨는 온 정성을 다해 기다란 홈통에 공을 넣어 굴렸다.
"제 사연이 뽑힐 줄은 몰랐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면 되나 봐요. 기분이 너무 좋아요." 긴장한 탓인지 그의 몸이 연신 뒤틀렸지만,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는 "내년 전국장애인체육대회를 목표로 열심히 연습해서 꼭 보치아 국가대표, 아니 보치아계의 김연아가 되겠다"고 했다.
보치아는 1987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패럴림픽 종목이다. 선수들이 코치의 도움을 받아 비스듬한 홈통에 공을 넣어 표적이 되는 공에 가장 가까이 굴리거나 공을 맞추면 점수가 주어지는 식이다.
구씨가 보치아와 연을 맺게 된 사연은 이렇다. 7세 때 장애 판정을 받은 구씨는 중1때인 2000년 삼육재활학교(경기 광주시)에서 보치아를 접했다. 체육수업에 잠깐 해봤는데 흥미가 생겼고, 이후 오후 3시부터 하루 2~3시간씩 꼬박 보치아에 매달렸다. 어머니 오세경(48)씨는 "몸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아이에게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다"고 회고했다.
목표가 생기자 구씨의 실력은 무섭게 자랐다. 그는 2002년 8월 전국뇌성마비인보치아경기대회부터 서울대표로 활동했고, 2005년 5월 제 25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는 은메달(2인1조)과 동메달(개인전)을 따는 등 각종 대회에서 상위권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2006년 학교를 졸업하면서 홈통 등 장비를 학교에서 빌릴 수 없게 된 것. 개인레슨은 집안 형편상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오씨는 "장비를 사주려고 애썼는데, 공 세트가 50만원, 홈통은 200만원이 넘다 보니 늘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토요일마다 보치아 장비를 대여해주는 서울의 한 복지관을 찾았지만, 장애가 심한 구씨는 다른 장애인에 치여 공 한 번 제대로 못 던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근육이 마비되고, 열도 많이 올랐다. 지난해 3월 구씨는 심장 내에 근육마비를 완화하는 장치를 넣는 대수술을 받았다. 2,000만원이 넘는 수술비와 치료비를 감당하느라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수술 후 6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던 구씨는 말수가 줄었고, 병세도 호전되지 않았다. 보치아 국내 랭킹이 19위까지 올랐지만 졸업 후엔 대회도 한 번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꿈은 그렇게 멀어져 가는 듯 했다.
그렇다고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4년간 꿈쩍도 하지 않던 구씨는 신문에 난 공고를 보고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사연을 적어 보냈다. 하늘도 그의 애절한 바람을 들은 것일까. 원래 구씨는 서류심사에서 떨어졌다. 행사를 주최한 한국장애인부모회가 당초 마련한 예산(100만원)보다 홈통 구입비용(200만원)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권유상 한국장애인부모회 사무처장은 "자신의 절절한 꿈과 희망에 대해 누구보다 솔직하게 털어놓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재검토를 했고, 결국 1위로 뽑혔다"고 귀띔했다. 권 사무처장은 "부족한 비용은 장비업체에서 흔쾌히 지원해줬다"고 덧붙였다.
구씨는 "도움을 받은 만큼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 나중에 꼭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장애인부모회는 매달 장애인가정 소원 들어주기 프로그램을 통해 선정한 장애인가정에 50만~1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후원 및 접수 문의 (02)2678-3131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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