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라는 나라가 1989년 국명이 미얀마로 바뀌기 전,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우리와 쌍벽을 이뤘었다. 지난 주 외교부의 한-아세안(ASEAN) 교류활동 일환으로 그 미얀마를 다녀왔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이 있었던 곳, 민주화운동으로 촉발된 2007년 9월의 사태를 기억하는 정도였다. 모든 뉴스의 중심이 양곤(Yangonㆍ옛 랑구운)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 나라의 수도가 내피도(Naypyidaw)라는 사실도 뒤늦게 기억해 냈다.
양곤과 내피도 사이를 오가는 고속도로 승합차 안에서 세종시 이야기가 나왔다. 대화의 끝은 국민적 합의가 없는 수도 이전은 비록 행정도시 건설이라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군사정권이 힘을 배경으로 전격적인 이전을 실행한 때는 2005년 11월이었다. 내피도에서 만난 미얀마의 고위 관리는 신속한 수도 이전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했다. 양곤에 있던 32개 부처를 320㎞ 떨어진 곳으로 완전히 이전하고 새 이름(왕의 거소라는 의미)을 짓기까지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국민동의 없는 전격 수도 이전
다른 공무원은 전격적 작전을 상세히 설명했다. 2005년 11월 6일 새벽, 갑자기 6대의 버스가 양곤의 주요 관청을 돌며 주요 문서와 집기를 싣고 사라졌고, 수많은 트럭들이 공무원들을 태우고 뒤를 따랐다. 수많은 공무원들이 졸지에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하루 만에 9개 부처를 이전했고, 이튿날 정부는 "수도를 이전 중"이란 짤막한 내용을 언론과 외국공관에 전했다.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은 세 명뿐이었는데 대통령 부부와 국무총리였다고 하니 총리 부인조차 당일 새벽에야 알았던 모양이다. 사라진 정부를 찾느라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당시 외신들은 수도 이전의 이유로 군정의 미국에 대한 공포를 꼽았다. 인권탄압 문제로 국제적 비난이 높아진 가운데 미국이 미얀마를 북한 쿠바와 함께 '폭정의 전초 기지'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항구도시 양곤에 비해 내륙지역 내피도는 인도양에 떠 있는 미 항공모함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5년이 흘렀지만 2010년의 내피도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 10㎢ 널찍한 평지에는 관공서 건물만이 수백m 이상의 거리를 두고 듬성듬성 들어섰고, 공무원 아파트 몇 동만이 붙어 있었다. 이제야 외부인을 위한 호텔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쇼핑몰이 얼마 전에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만난 공무원은 물론 호텔이나 쇼핑몰의 간부급 이상은 대부분이 옛 수도 양곤에 가족을 두고 있는 '기러기 아빠'였다.
행정부는 옮겨갔으나 경제ㆍ사회의 중심이 양곤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표현처럼 '밀림 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드넓은 농경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지만 우리 식 표현으로 '+알파'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나이가 들어도 양곤까지 가야 제대로 학교에 보낼 수 있고, 근무하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니 기러기 아빠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수밖에. 공무원들은 도시의 모양을 갖추려면 최소한 10년은 더 지나야 한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알파'없어 도시 조성 힘들어
새로운 수도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진짜 이유는 양곤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군사정부 인사들이 사는 곳이란 인식도 있지만 국민의 의견을 묻지 않은 이전에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커 보였다.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들만의 결정"이라며 아직도 수도는 양곤이라고 했다. 중요 민간 단체들은 자신들의 홍보책자 지도에 여전히 내피도를 표시하지 않고 있었다. 시민들이 요지부동이니 내피도로 몰려갔던 군인이나 공무원의 가족들이 양곤으로 역류하는 현상까지 있었다.
한국과 미얀마, 세종시와 내피도를 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인위적 수도 건설의 실제 케이스인 만큼 내피도와 양곤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는 있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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