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와 농촌 사이… 가난과 소박 사이… 경계에서 자라는 '연두색 꿈'
뜨거운 태양의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히는 7월의 한낮인데도 원두막에서는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데다, 토마토 옥수수 고추 감자 콩 등 주위에서 자라는 50여종의 작물이 시원한 기분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잡초도 많고, 거름통에서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니 영락없는 밭이다. 그러나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5층 안팎의 아파트와 사무실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경기 시흥시 정왕동 도로 변에 있는 이 밭에서는 도시와 농업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자활사업으로 시작한 농장
2,500평 규모의 이 밭은, 언뜻 조금 큰 텃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0가구의 생계가 달려 있는 어엿한 농장이자, 이들이 서로 기대 힘을 합치고 살아가는 농업 공동체다. 2005년 시작해 햇수로 벌써 6년이 된 이 농장의 이름은 연두농장. 곱고도 여린 어린 아이의 마음을 연두색에 비유하면서 그런 심성을 끝까지 잃지 말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수도권 도시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한 자활사업으로 농장이 시작했으니 도시인의 일반적인 귀농과는 성격이 다르다. 신용불량자, 저소득가정의 모녀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여성들이 농사를 지어서라도 돈을 벌겠다고 모인 것이다. 그렇다고 농사 경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임 운영자로 합류한 변현단(46)씨를 포함해 그 누구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농사를 처음 지은 곳은 시흥시 계수동의 2,000평 밭인데 아는 사람으로부터 무료로 빌린 것이다. 쇠똥과 질소를 섞어 퇴비를 만들었지만 둘의 배합비율을 잘못 맞춰 토마토가 뒤틀리는 등 초창기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농장 식구들의 남편 가운데는 알코올중독자, 도박중독자, 사회부적응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틈만 나면 밭으로 달려와 행패를 부리는 등 시끄러운 날도 많았다. 농장 대표 변 씨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품어주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며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초창기를 돌아보았다. 농장 식구들 역시 돈벌이의 수단으로 농사를 생각했지 농사 그 자체에 큰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수확량은 서서히 늘었고 재배하는 밭도 조금씩 넓어졌다. 지금은 계수동 외에 정왕동에 2,500평, 금이동과 안현동에 각각 500평, 광명시 옥길동에 1,500평의 밭이 있으며 정왕동에는 500평 규모의 과수원이 있다. 이 모두 무료로 임차한 것이다.
유기농업 표방, 화학비료 비닐 안 써
농장은 처음부터 유기농업을 표방했다. 화학비료를 전혀 치지 않고 비닐로 땅을 덮는 일도 없다. 한의원에서 한약 찌꺼기를 받아와 썩힌 뒤 거름으로 만들어 밭에 뿌렸으며 톱밥과 분뇨 등 유기물로 거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잡초의 생장을 막기 위해 흔히 쓰는 비닐도 사용하지 않는다. 비닐이 환경오염을 낳고 식물의 뿌리를 연약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을 두고 주위의 농사꾼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다"며 혀를 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농사 짓기 첫해에 농약을 주지 않고 고추를 재배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농약을 치지 않고 고추를 생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이들이 재배한 무농약 고추는 탄저병 피해를 입지 않았고 수확량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 해 겨울 경남 하동에서 열린 자연농업무농약대토론회에서 그 사실을 발표했더니 전국의 내로라하는 유기농업인들이 "농사 초보들이 일을 냈다"며 깜짝 놀랄 정도였다.
유기농업을 하기로 한 것은 변 대표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고 그 뒤로는 진보정당과 인터넷신문 등에서 일했다. 동남아, 유럽, 아프리카 등을 배낭여행하고 중국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다가 2000년 귀국한 그는 이후 산과 숲에 매료됐고 생태와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자연에 흠뻑 빠진 그는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할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귀농을 준비했다. 2004년에는 1년 동안 전국의 농촌을 돌아다니고 유기농법, 자연농법을 익히다 연두농장 일을 시작했다. 자연의 유기적 순환을 존중하는 그가 유기농업을 주창한 것은 당연했다. 그의 생각은 최근 출판한 라는 책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에서 그는 경작하고 재배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라는 잡초가 쓸모 없는 풀이 아니라 나름의 맛과 향을 지닌 고마운 식물이라고 말하면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농장에서도 가급적 잡초를 그대로 두?가끔 잡초를 벨 때는 그냥 밭에 던져둬 자연적인 거름이 되도록 한다.
수입 적어도 살 수 있어
농장 식구들은 재배 작물을 회원들에게 판매하고 그 수입을 나눠 가진다. 농장에는 텃밭을 가꾸는 텃밭회원과, 이곳에서 나는 채소를 구입하는 장바구니회원 등 여러 종류의 회원이 있다.
농사가 손에 익고 수확량이 늘어나면서 농장 수입 역시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편이다. 요즘은 월 수입이 1인당 60만원이 채 안 된다. 도시에서 생활하기에는 턱 없이 적지만 농장 식구들은 어쨌든 거기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 밭에서 나는 채소를 주로 먹고 육식도 피하니 먹는데 많이 들지 않는다.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입으니 옷 값 또한 적게 든다. 주거 비용은 정부 지원을 받거나 전세로 살기 때문에 역시 당장은 큰 부담이 아니다. 현금카드를 쓰지 않고 대형 마트에도 가지 않는다. 밭에서 키우는 어성초 등으로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쓴다. 그랬더니 이 정도 수입으로 생활하는 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물론 문화활동이나 사교육 등은 할 수가 없고 갖고 싶은 물건도 제대로 살 수 없으니 안락한 물질적 삶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변 대표는 "도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큰 돈 벌기가 불가능하다"며 "수입이 매우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거기에 맞춰 살기로 하면 못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더 많은 돈을 벌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거니와, 더 벌겠다며 몸과 마음을 쓰는 것을 반드시 옳다고만 볼 수 없다는 게 변 대표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입을 모두가 다 기꺼이 견뎌내는 것은 아니다. 농사가 힘든데다 벌이마저 시원치 않기 때문에 요즘도 농장을 떠나는 식구들이 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
현재 농장 식구는 10명이다. 지금까지 여러 명이 들고 나고를 거듭했는데 지금 보니 출발할 때와 인원이 같다.
농장주, 일꾼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농장은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됐다. 하루 일과를 함께 정하고 중요한 일은 회의와 토론으로 결정한다. 일을 마친 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철 등에는 전통농업, 농사철학, 토종종자 등에 대해 공부하고 신문을 함께 읽으며 세계경제의 흐름 등을 배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들은 덜 벌고 덜 쓰자는 데에 어느 정도 생각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단순하게 보면 수입과 지출을 맞추자는 알뜰한 생활방식이지만, 거창하게 보면 소박한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적 성격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은 농장 회원들이다. 회원 가운데 20여명은 옥길동 농장의 밭 300여평에서 기장과 콩을 공동경작하고 있다. 비록 사는 곳은 도시이지만, 자신이 먹을 것을 자신의 손으로 재배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시농업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농장 측은 내년에는 공동경작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농부학교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농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 등도 도시 생활과 농사의 결합을 위한 것이다.
농장은 이것 말고도 계획이 많다. 당장 8월에는 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정왕역에 무인판매대를 설치할 예정이다. 농장에서 재배한 식물을 역 한쪽에 두면 누구든 돈을 놓고 가져가면 되는 것으로 시골에 있는 양심가게와 비슷하다.
장기적으로는 농장이 통째 농촌으로 이주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농장 식구와 그들의 가족이 모두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준비는 하고 있다. 올해 초에 이미 빈 집, 노는 땅을 구해 경북 울진으로 2가구가 이주했고 경남 산청과 경기 여주에도 각각 한 가구가 옮겨갔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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