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생아 제대혈 (탯줄 혈액) 보관 서비스
우리 월드컵 전사들의 경기가 한창일 때 대표팀 수문장 정성룡 선수는 경기장 밖의 이야기로도 관심을 모았다. 아르헨티나전 다음날인 6월18일 아들 사랑이(태명)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정 선수가 출산에 앞서 국제전화로 아들의 제대혈 보관을 신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생아 제대혈 보관 서비스도 새삼 뉴스를 탔다. 특히 정 선수의 보관 신청엔 경험자인 이영표 선수 부부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엄마들 사이에서 이 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점증하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자녀 제대혈 보관은 아직 대부분 일반인들에게 '먼 얘기'인게 사실이다. 이 서비스가 국내에서 상용화한 지 올해로 10년. 출산을 앞둔 예비엄마들의 눈길을 끌면서도 아직은 결정을 망설이게 하는 제대혈 보관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보관 제대혈 어떻게 쓰이나
제대혈은 신생아의 탯줄에서 채취한 혈액이다. 약 100ml 정도 채취하며 이를 분리ㆍ검사 후 냉동 보관했다가 백혈병이나 뇌성마비 같은 난치성 질환에 걸렸을 때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다.
제대혈에는 골수와 같이 혈액을 만드는 면역체계의 모세포인 조혈모세포와 우리 몸의 연골과 뼈, 근육, 지방, 신경 등으로 분화하는 중간엽 줄기세포가 많이 들어있다.
조혈모세포는 림프종과 백혈병 등 혈액질환을 무리없이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즉 고용량 항암제는 골수를 파괴하는데 조혈모세포는 골수를 새로 만들어냄으로써 지속적 치료를 가능케한다. 자가 제대혈을 이식하는 경우도 있고 타인 제대혈을 이용할 수도 있다.
반면, 중간엽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경세포에 주입돼 신경세포로 직접 분화하거나 신경세포 생성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신경계 질환 치료에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제대혈은 조직적합성항원(HLA)이 4개 이상만 일치해도 이식이 가능하므로 6개가 일치해야 하는 골수보다 찾기가 수월하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9월 이후 차병원과 메디포스트 등 선두업체들이 제대혈 이식을 통한 뇌성마비와 요실금 치료 임상시험에 돌입했다.
자가 제대혈ㆍ공여 제대혈
제대혈은 제공자와 이용자의 관계 및 취지에 따라 자가 제대혈과 공여 제대혈로 나뉜다. . .
그러나 현재 공여 제대혈 기증자는 자가 제대혈 보관 신청자보다 현저히 적다.
자가 제대혈 보관 건수가 30만 건인데 비해 공여 제대혈 기증건수는 그 10분의 1인 3만 여건에 불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녀 제대혈을 기증하더라도 기증자는 기증한 제대혈에 대해 소유와 권리 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혈 보관 신청자 전체 산모 중 5% 이상으로 늘어
자가 제대혈 보관 서비스 시장은 확대 후 다소 정체된 상태다. 업계에 따르면 신생아 제대혈 신청자는 전체 산모 가운데 5%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제대혈 보관 선두업체인 메디포스트의 경우 서비스 건수가 도입 첫해인 2000년에 11건, 2001년 1,200건이었던 게 최근 수년간 1만건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니 초기에 비해 약 10배 정도 늘어난 셈이다.
제대혈 보관 서비스를 하고 있는 업체와 병원도 20개에 육박할 정도다. 각 산부인과 병의원에서 채취한 제대혈을 장기 보관해주는 이런 업체들로는 메디포스트, 세원셀론텍 등 전문기업과 차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외에 녹십자와 보령바이오파마 등 제약업체가 활발하다. 시장규모는 지난해 현재 3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증가세는 '스타마케팅'에 힘입은 바 크다. 사실 신생아 제대혈 보관은 스포츠 스타들에 앞서 유명 연예인들의 출산 소식과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미 배우 김승우ㆍ김남주 부부에 이어 부인이 치과의사인 개그맨 남희석씨도 자녀의 제대혈을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공개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최근 출산한 연예인 상당수도 자녀 제대혈 보관을 신청했다고 귀띔하고 있다.
하지만 한 병원이 서비스 이용자들을 분석한 결과 수도권 거주자가 60%였고, 강남지역 거주자들이 전체의 18% 가량을 차지해 이 서비스 이용은 여전히 특정지역에 기반한 '그들만의 리그'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 진보 따라 보관 신청 더욱 늘어날 듯
2007년 첫 출산 때 아들의 제대혈을 맡긴 정미진(31)씨는 오는 8월 출산 예정인 둘째의 제대혈도 보관하기로 했다. 정씨는 "처음엔 아이를 위한 막연한 보험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이식사례도 늘고 있고 관련 기술도 발전해 둘째 아이 것도 보관키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의 경우처럼 관련 의료기술이 진보하고 서비스 비용이 줄면 제대혈 보관 서비스 이용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자가제대혈 이식을 뇌성마비 치료에 적용한 사례가 잇따라 나오면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차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강명서 교수는 "현재 청각장애 치료도 제대혈을 통한 동물실험에 들어갔으며, 파킨슨병과 당뇨병, 간질환 치료 등을 위한 임상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 "항암치료 큰 도움… 제대혈로 새 희망 찾았어요"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할 지 모르겠다. 성시원(40)씨는 지난 5일 아들 인창(6)이가 목 부근에 발생한 림프종 치료를 위해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자가 제대혈 이식수술을 마치자 비로소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여느 또래와 다름 없던 아들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난 것은 지난해 10월말. 인창이는 그때 신종플루 확진을 받고 치료 후 완쾌됐다. 하지만 보름 정도 지나 아들의 목 주변에 동그란 알사탕 크기로 뭔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병원의 진찰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암은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는 감기나 알레르기, 가와사키병(소아에서 발생하는 급성 열성 혈관염)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인창이의 중상은 가라 앉는 듯 했으나 12월 중순까지 두 번 재발했다.
증상 발생 후 1개월이 지나서까지도 확실한 원인을 알지 못해 속을 태우던 인창이는 결국 지난해말 입원해 조직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림프종이었다. 그동안 전혀 중병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성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징후 발견 후 2개월 안에 항암치료에 들어가면 효과가 뚜렷하다는 점이었다. 성씨는 아들이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오히려 감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씨는 아들과 림프종과의 싸움에서 최대 분수령은 이번에 받은 자가 제대혈 이식수술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인창이의 자가 제대혈은 카테타(도관)를 통해 가슴 부위 상부대정맥에 주입됐다. 통상 림프종 치료를 위해 투입된 고용량의 항암제는 아이의 골수를 파괴하는데, 이번에 주입된 제대혈 속의 조혈모세포는 골수를 회복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속적인 항암제 투여와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성씨는 "이식 제대혈 속의 조혈모세포가 아이의 골수에서 적혈구나 혈소판을 만들어낼 정도로 정착하는데 3~4주 가량 걸리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지만 일단 한시름 놨다"며 "잘 견뎌준 아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번 수술이 가능했던 건 성씨가 2003년 인창이 출산 때 보관한 제대혈 덕분이다. 성씨는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필요할 때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관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인창이의 수술을 집도한 원성철 신촌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최근 제대혈을 보관해두는 경우가 있어 치료 전 제대혈을 보관해둔 게 있는지 환자 부모를 대상으로 확인해 본다"며 "인창이의 경우 마침 제대혈이 보관이 되어있고,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운이 좋은 경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원 교수는 "제대혈을 이식한다고 해서 치료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며 "제대혈의 경우 생착되는데 골수나 말초조혈모세포보다 시일이 오래 걸리고, 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환자 체중에 따라 필요로 하는 양이 다른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 서비스 이용 증가세 주춤 왜?
높아지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제대혈 보관 서비스 이용의 증가세는 최근 정체돼있다. 상용 서비스 개시 이후 3년 만에 1만건을 돌파했지만 그 이후 서비스 이용자는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왜일까.
우선 절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보관을 하더라도 실제로 활용할 가능성은 자녀나 가족이 난치병에 걸릴 확률 만큼 극히 낮기 때문에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비용 또한 만만찮다. 건 당 100만원을 넘는 처리 및 보관비용을 감당하기가 웬만한 가정으로선 부담이다.
제대혈에 대한 정보 부족도 확산의 걸림돌이다. 아직 제대혈 활용에 대한 정보는 관련 업체의 안내나 언론에 보도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가운데 업체들의 과장광고나 제대혈 관리부실 사례 등이 알려지면서 제대혈 보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암암리에 퍼진 것으로 보인다.
이영호 교수는 "2000년대 초 제대혈 보관 사업을 시작한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치료와 관련해 과장광고를 했다"며 "이를 보고 찾아온 신청자들이 실망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제대혈 활용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만큼 자가 제대혈 보관이든, 제대혈의 사회적 기증을 통해서든 제대혈을 활용한 질병치료는 점차 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 "모든 환자 쓸 수 있게 기증문화 확산돼야"
"보관된 제대혈은 본인 뿐 아니라 최소 조건만 맞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가 제대혈 보관은 자녀 본인만 쓰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제대혈 이용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사실상 버려지는 거죠. 따라서 제대혈 보관은 순수한 기증(공여)을 통해 모든 이들이 쓸 수 있는 방향으로 정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영호(아래 사진) 한양대병원 소아청소년학과 교수는 대한혈액학회 제대혈이식연구회 위원장을 맡는 등 국내 제대혈 이용 치료분야의 선두주자다. 하지만 그는 지난 10년 간 자가 제대혈 보관 보다는 보관된 제대혈이 모든 환자에게 쓰일 수 있도록 기증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교수는 "일례로 백혈병과 소아암 치료에 도움을 주는 조혈모세포 이식에서는 제대혈의 조직적합성항원(HLA) 6개 중 4개만 환자의 유전자형과 일치하면 어느 제대혈이나 쓸 수 있다"며 "제대혈은 기증을 통해 사회적 풀(pool)로 운영되는 게 이용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연간 신생아 출생은 45만 건인데 비해 치료에 필요한 제대혈 수요는 향후 5년간 5만개 정도"라며 "이 정도면 제대혈 보관의 공익성 등을 예비 부부 등에 적극 홍보하면 무난히 확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2월 '제대혈 관리 및 연구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도 향후 제대혈 보관 및 활용 확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내년 7월 제대혈 관련 법안이 시행되면 국가 차원의 제대혈 관리가 가능해지면서 관련 시장도 체계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를 들어 제대혈 보관업체가 망했을 경우 이를 국가가 책임지고 운영하는 방안, 도산한 회사가 보유한 정보를 제대혈 정보센터가 관리하는 방안 등 하위법령이 구체화하고 있는 단계다. 법안엔 또 사기업에 자가로 보관된 제대혈도 보관시한이 만료된 이후엔 기증 제대혈처럼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기증 제대혈의 국가적 관리를 위해서는 적정한 예산 배정이 이루어 져야 한다"며 "기증 제대혈 1개를 처리ㆍ보관하는데 드는 비용은 원가만 70만원 정도가 들기 때문에 법률 시행에 앞서 관련 예산 지출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뇌성마비와 신생아저산소증, 소아당뇨병 등 중간엽줄기세포가 쓰이는 질병 치료는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고 타인의 제대혈이 쓰일 수 있을 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가 제대혈 보관의 필요성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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