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깔보다 맛 중시한 우리 차… 그 구수함의 비결은 '덖음'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차를 마셨다 한다. 아직도 흔히 쓰는 '다반사(茶飯事)'라는 표현이 그 시대부터 유래되었다니, 실제로 선조들은 차 마시고 밥 먹고를 똑같이 중요시 했었나 하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의 흐름이 가속화 될수록 다반사는 점점 사라져 갔다. 따끈하게 물을 데워 차 잎에 따라 붓고, 찻물이 우러나는 동안 다관과 찻잔을 따끈한 물로 헹궈 데우고, 우러난 차를 천천히 따라 서너 번에 나눠 마시며 그 맛을 음미하는 일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흥미롭지 못한 화면을 단 일 초도 견디지 못하고 클릭해 버리는 현대인의 특성상, 십여 분은 족히 투자해야 하는 티타임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겠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간을 들여야 할수록, 공을 들여 챙겨야 할수록 반드시 우리 차 한 잔을 음미하고 지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 30년 세월이 만들어 낸 제주 산 우리 차 브랜드 '오설록'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차 밭, 그리고 티 하우스
제주도 여행이 붐을 이루면서 새삼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제주산 '우리 차'다. 아담한 렌트카나 스쿠터를 빌려 신나게 제주도를 누비다 보면, 파랗게 펼쳐진 다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윤기 도는 실크 양탄자처럼 촤락 펼쳐진 녹빛의 차 밭은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될 즈음 차 밭 너머에 있는 '티 뮤지엄'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유기농 인증까지 받은 차 밭에서는 명차를 기르고, 이웃한 티 뮤지엄에서는 차의 생산부터 마시는 방법까지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배우고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차 밭과 뮤지엄 말고 하나의 시설이 더 있는데, 바로 연구실이다. 우연한 기회에 잠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이정대 연구원만 해도 그의 아버지 대부터 차를 만지고 가꾸어온 대물림 다도인이다. 차밭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연구실에는 차의 품질을 가늠하는 관능검사, 한국형 발효차의 개발과 연구 등이 이루어진다.
황무지였던 땅을 이처럼 차 농사에 꼭 맞는 비옥한 밭으로 가꾸는 일을 30년 넘게 해왔다는 기업의 열정에 감동할 무렵 바람이 싹튼다. '이렇게 잘 만든 우리 차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마시면 좋을 터인데' 하는 바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로 이 연구원에게 설명을 들었던 인사동의 '오설록 티 하우스'로 발길을 돌린다. 인사동 초입에 만들어진 티 하우스는 총 세 개 층으로 나뉘는데, 1층은 현관문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개방되어 있는 오픈 갤러리 형식, 2층과 3층은 직접 차를 마셔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이 따로 없는 제주도식 가옥처럼 따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아도 그냥 발걸음이 닿게 만든 그곳 1층에는 내국인 뿐 아니라 관광차 한국에 들른 외국인의 비율이 꽤 높은 편. 각종 차 시음과 시향, 설명을 듣고 구매할 수 있는 널따란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바로 덖음솥이다.
"한국에서도 차를 만드느냐고 놀라거나 한국 사람들이 차를 예로부터 마셔온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외국 분들이 의외로 많으세요"라고 말하는 양재성 티 소믈리에. 요리사 출신의 티 소믈리에라는 이력을 가진 양 소믈리에는 특유의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1층에 들르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국 차를 전도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가장 많이 하시는 질문이 일본 녹차와 한국 녹차의 차이점인데요, 일본 차는 빛깔을 중요시 하여 수증기로 찌는 방법을 쓴다면, 한국 차는 맛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구수한 단맛을 이끌어낼 수 있는 '덖음' 즉, 로스팅(roasting)의 방법을 쓴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 눈길은 덖는 과정을 직접 시연할 수 있게 만들어진 덖음솥에 머문다. 주물 장인이 제작한 덖음솥은 단순히 전시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매일같이 이 공간에서 제공되는 시음용 티도 그 날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하루 몇 차례씩 이 솥에서 덖는다. 일전에 인터뷰를 했던 대안스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우리 음식은 튀기거나 볶는 법이 원래 드물었다. 그저 '덖는 맛'이 우리 음식의 특징이었다고 하시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해서 '로스팅'이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덖는' 방법으로 찬을 만들고 차를 만드는 방법은 우리 고유의 요리법인 것이다.
"덖는 과정을 이해하고 우리 식으로 우려낸 차를 함께 마시고 나면 고객들이 고맙다는 말씀을 하실 때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 차, 제주산 차에 대해 잘 모르던 외국 분들은 차를 구매하고, 앞으로는 한국식으로 차를 마시겠다는 다짐과 함께 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양재성 소믈리에는 이 티 하우스에 있는 총 열한 명의 티 소믈리에들이 단순히 차를 판매한다기 보다는 문화를 전달하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녹차·가향차·발효차의 다양한 맛
"녹차를 많이 마실수록 입맛이 민감해져요. 특히 짠맛, 자극적인 맛을 멀리하게 되네요."
오붓한 분위기에서 직접 다도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오설록 티 하우스의 3층에서 만난 김경아 티 소믈리에는 입맛이 정화되고, 피부가 맑아지는 등 매일같이 마시는 녹차가 일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차를 자주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우려내는 것이 우선이지요" 라며 차는 잎에 따른 맛도 천차만별이지만 어떤 물을 선택하느냐 역시 맛을 좌우하는 요소라고. 미네랄이 가득한 물, 병에 담긴 생수, 연수기를 통해 따르는 물 등을 이용해 차를 우리면 그 맛이 다 다르다. 그 가운데 맑고 투명한 빛과 깔끔한 맛을 보장하는 연수기 물로 우린 차를 가장 선호하는 김경아씨는 찻잎 2g에 물 150cc, 그리고 1분반에서 2분을 우려내는 공식만 기억하면 차 맛을 즐기기 쉬워진다고 설명한다.
김경아 티 소믈리에를 비롯한 여러 명의 차 전문가들은 티 클래스를 열기도 한다.
명품 녹차를 일로, 우전, 세작으로 나누어 맛을 보고, 다시 꽃이나 과일을 첨가한 가향차인 제주 난꽃 그린티를 마신 다음 한국식 발효차를 두어 종 맛을 본다고. 재미있는 것은 차의 종류가 바뀌면 차를 담는 잔이 바뀐다는 사실인데, 녹차의 경우 '수색'이라 부르는 차의 빛을 보기 위해 백자를 선호하고, 가향차의 경우 화려한 향기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잔을 쓰며, 맛과 빛이 짙은 구수한 발효차의 경우 붉은 빛으로 우러난 차를 돋보이게 하는 진갈색 계열의 다소 투박한 잔이 어울린다고 한다. 설명을 듣다 보니 인사동 거리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흰 찻잔 한 개, 작은 꽃무늬를 그려 넣은 찻잔 한 개, 그리고 뚝배기처럼 투박한 맛이 있는 진갈색의 잔을 한 개 갖추고 나만의 티 클래스를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말은 적게, 생각은 많이 하게 해주는 우리 차 마시는 습관은 어른들이 먼저 시작하지만 아이들이 반드시 익혔으면 좋을 우리나라의 귀한 유산이다.
■ 가정에서 따라 할 수 있는 '티 클래스'
차를 전혀 마시지 않던 사람이라면 '인퓨져(infuser)'라 부르는 거름망 하나를 장만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오설록 티하우스의 김경아 티 소믈리에는 권한다. 거름망이 있으면 머그컵에라도 차를 우릴 수 있는데, 찻잎 2g, 물 150cc, 그리고 차를 우리는 시간 1분30초에서 2분만 기억하면 된다.
이처럼 비교적 간단히 차를 마시기 시작하여 익숙해질 무렵에는 수구와 찻잔을 갖추면 좋다. 수구에 찻잎을 넣고 물을 따라 우리면 찻잎이 가라앉으니 웃물만 찻잔에 따라 마시면 되는 것이다.
차와 함께 내는 다과는 차의 맛에 따라 달리하면 좋은데, 맛이 여린 녹차에는 떡이나 약과를, 가향차에는 깨나 콩으로 고물 묻힌 한과를, 맛이 진한 발효차에는 생강정과나 얼그레이 등의 찻잎을 넣어 구운 쿠키가 주로 어울린다.
좋은 녹차는 '삼록(三綠)'을 보고 구분할 수 있는데, 잎의 빛이 고르게 푸른지, 또 우려진 탕빛이 맑고 연한 녹빛인지, 그리고 젖은 찻잎의 빛이 고른지를 본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사진=임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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