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끊임없는 간척사업을 통해 미래를 개?해왔다. 자연히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들이 일찍부터 시작됐다. 과감하게 새것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문화를 융합시키는 네덜란드 특유의 개방적 사고는 도시 디자인에도 적용됐다. 보존과 변화, 일상과 예술을 조화시켜 암스테르담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베스터가스파브릭(Westergasfabriek) 문화공원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 가스공장 주민투표로 10년 리모델링…문화공원으로 진화
바흐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스탱크
넓게 펼쳐진 잔디 위에 한가로이 드러누운 연인, 유모차를 밀며 산책을 즐기는 여성,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가며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버스로 20분이면 닿는 베스터가스파브릭 문화공원의 풍경은 여느 공원과 다를 바가 없다. 공원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회색빛의 거대한 원형 가스탱크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 공원의 이름은 '베스터 가스공장'이라는 뜻이다. 1903년 조성된 이곳은 독일에서 들여온 석탄으로 가스를 만드는 발전소 지대였다. 그러나 천연가스 개발로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1992년 에너지회사가 이곳을 떠나자 암스테르담시는 주민 투표를 거쳐 이곳을 녹지와 문화 시설이 조화를 이룬 문화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프랑스,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이 산업유산을 활용해 도시 재생을 꾀한 사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오염과 냄새, 소음으로 뒤덮였던 땅은 10년에 걸쳐 서서히 아름다운 녹지로 바뀌었고, 공장의 각종 건물들은 수리ㆍ보수를 통해 새로운 쓰임새를 얻었다.
공장의 보일러실은 유럽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극장, 작업 관측소는 '에스프레소 공장'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이 됐다. 가스탱크는 오페라, 파티, 콘서트, 패션쇼 등 각종 대규모 행사를 여는 복합공간이 됐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축제인 홀랜드 페스티벌도 이 공간을 활용한다. 지난달에는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가스탱크 내부를 실내악 연주홀로 변형시키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흰색의 인조섬유 막이 공간 내부를 소용돌이치듯 휘감은 가운데 일주일 내내 바흐의 음악이 연주됐다.
건물의 외형을 통해서만 과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방문객들이 스마트폰으로 건물 입구에 부착된 QR(Quick Response) 코드를 스캔하면 그 건물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온다. 공원 벤치에 앉아 버튼을 누르면 스피커를 통해 두런두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스공장 시절 이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회상, 그리고 공원 방문객들의 감상기다. 그 목소리들이 어우러지며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연결된다.
문화와 상업을 융합시킨 도심형 공원
베스터가스파브릭 문화공원 내부에는 30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갤러리, 공연장, 예술교육센터 등 문화시설뿐 아니라 카페와 레스토랑, 바, 영화관 등 상업시설도 있고, 그래픽디자인 업체와 게임회사, TV 스튜디오, 유치원 등도 있다. 젊은층의 발길이 잦을 수밖에 없다. 점심 시간이 되자 식당은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이곳 바에서 만난 대학생 마로우 드 종은 "친구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자주 온다"며 "주말에 공원 내 클럽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댄스 파티도 인기"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 대해 지나치게 상업적 성격이 짙다는 지적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1993년부터 줄곧 이곳의 공간 운영과 기획을 맡고 있는 디렉터 리스베스 얀센은 "문화를 얼굴로 내세워 상품의 경제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면서 "고상한 취향을 가진 소수가 아니라 전 시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공간이기에 예술에만 치중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빈 공간에 예술가들만 넣는다고 해서 지역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라며 "복합적인 공간 구성과 프로그램 운영으로 시민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스터가스파브릭 문화공원은 리노베이션을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공장 건물들을 개인에게 팔았다. 하지만 입주업체 선정과 개최 행사 결정 등 콘텐츠 구성은 전적으로 공원 기획팀에서 맡는다.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통해 공간을 다채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임대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또한 각 건물에 고정적 용도를 부여하지 않고 지역 주민들의 수요에 따라 성격을 바꿔감으로써 유연하게 트렌드를 반영한다.
공간이 너무 예술적으로, 혹은 너무 상업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1년에 열리는 100여 개의 대규모 행사 중에는 오페라 공연이나 사진 전시도 있지만, 인기가痔?콘서트나 기업이 주최하는 테크노 파티도 있다.
"창의적 콘텐츠가 공원의 핵심"
베스터가스파브릭의 첫 번째 매력은 잘 디자인된 녹지와 역사적 건물의 조화가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있다. 하지만 얀센 디렉터는 "외관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흥미로운 콘텐츠가 없었다면 지역 주민들과 동떨어진 공간이 됐을 것"이라며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해야 좋은 공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심포지엄 등을 통해 베스터가스파브릭 문화공원의 사례를 국내에 소개해온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21세기의 공원은 단순히 녹지를 통해 휴식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 형성의 중심지로 그 기능과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면서 "베스터가스파브릭 문화공원은 현대인의 수요를 잘 반영한 도심형 공원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의적인 도시 기획의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 인터뷰- 한스 테일 암스테르담市 도시계획부 CEO
"도시 디자인의 비전을 세울 때 30년 후의 미래를 기준으로 잡습니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 그때그때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5년마다 수정을 합니다."
새로운 공간 조성과 배치, 교통시스템 등 암스테르담의 도시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는 한스 테일(49) 암스테르담시 도시계획부 CEO는 장기적 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시는 급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기에 먼 미래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원격 교육ㆍ근무, 재생에너지 활용 등 자원 고갈을 극복할 수 있는 도시 만들기에 대한 것이다.
그는 "암스테르담은 열린 마음과 기업가 정신이 어우러진 도시로, 19세기 후반부터 디자인 마인드를 도입했다"고 소개했다. 물론 '물의 도시' 암스테르담의 환경적 제약도 컸다. 하지만 그는 "물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적극적으로 수로를 만드는 등 물을 '활용'함으로써 물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5년 전에 간척 사업이 마무리된 이스턴 도클랜드 지역의 경우 땅의 가운데 부분을 높여 완만한 경사를 만듦으로써 어디서든 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전거 문화다. 도심 교통분담률이 60%에 이를 정도다. 보행자와 자전거, 자동차, 트램이 나란히 지나가는 도로 풍경, 그리고 중앙역 앞의 거대한 자전거 주차장 등은 암스테르담의 상징이 됐다. 테일은 "간척 사업, 도로 건설, 교통 시스템 정비 등 모든 도시계획에는 기본적으로 자전거 이용 편의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된다"고 설명했다. 높은 인구밀도와 공간 부족으로 인해 시작된 자전거 문화를 정책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에코 도시의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지난 2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 디자인 도시 서미트'에 암스테르담시를 대표해 참가했던 그는 "서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인데 그 흔적을 별로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에 대해서도 "도시 디자인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인상적이었지만, 계획중인 사업이 광범위해 모두 실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면서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 국내 사례- 서울 재생 공원들
서울에도 '재생'을 테마로 한 공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강북구 번동에 개장한 북서울꿈의숲의 원래 모습은 쇠락한 놀이공원이었다. 1990년대 강북지역 최대 위락시설이었던 드림랜드가 2000년대 들어 다른 테마파크에 밀리고 시설 투자마저 중단되면서 흉물로 전락하자, 서울시가 이를 89만㎡ 규모의 대형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호수인 월영지를 비롯해 잔디광장, 정자, 산책로, 야생초화원 등을 갖춘 북서울꿈의숲은 지역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같은 시기, 물과 재생을 테마로 한 친환경공원을 표방하며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문을 연 서서울호수공원은 옛 신월정수장을 단장한 곳이다. 2003년 정수장 가동이 중단된 뒤 서울의 지역간 불균형 해소 차원에서 서남권의 대표 공원으로 조성됐다.
2002년 개장 후 연간 980만명이 찾는 서울 최대 규모 공원으로 자리잡은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은 난지도 쓰레기매립장 부지를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사례이며, 영등포구 양화동의 선유도공원 역시 정수장 건축구조물을 재활용한 생태공원이다.
서울은 대규모 공원을 만들 만한 미개발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용도 폐기된 부지를 공원으로 재생시키는 사업은 시민들에게 새로운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큰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공원화 사업이 단순한 외형적 재생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전에 시민, 전문가와 충분한 협의과정 없이 일방적인 관 주도로 순식간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북서울꿈의숲의 경우 공원 조성계획 발표부터 개장까지 딱 2년만에 끝났다.
김아연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는 "독일 뒤스부르크 노드 공원의 경우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조성이 진행 중"이라며 "공원화를 통한 도시 재생이 지속성을 지니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획 단계부터 지역 커뮤니티를 참여시켜 소속감을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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