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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23> 연극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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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23> 연극과 현실

입력
2010.07.0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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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19일 부산 가마골 소극장 문을 엽니다. 심우성 선생의 전통 꼭두극 '문' '쌍두아'를 초청하였고, 극단 부두극장의 '감마선은 달무늬 얼룩진 금잔화에 이떤 영향을 주었는가'(이성규 연출)에 이어 연희단 거리패 창단 공연 작품 '푸가'(윤대성 원작 '미친 동물의 역사'+파울 첼란의 시/이윤택 연출/8.17-31)가 공연됩니다.

'푸가'는 제가 1972년 3월 서울연극학교 입학 당시 신입생 환영공연으로 보았던 '미친동물의 역사'(윤대성 작 유덕형 지도연출)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해내고 재구성한 연극이었습니다. 1972년 3월 남산 드라마센터 스튜디오에서 보았던 학생 작품 '미친 동물의 역사'는 제가 보았던 기존의 그 어떤 연극과도 다른 문화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연극에서 제가 매료된 것은 배우의 육체성이었습니다. 대사는 단말마처럼 짧고 강력하게 내뱉어지고, 어둠 속에서 배우들은 구르고 뛰어 오르면서 집단적인 몸의 움직임을 표현해 내고 있었습니다. 왜 저렇게 고통스럽고 가학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옆 자리의 여학생이 짜증스러운 느낌으로 툭 말을 내뱉었습니다.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이야. 말이 신뢰를 잃었고, 사람들은 이제 말에 식상해져 버렸기 때문이야. 그래서 저렇게 몸부림치는 거야."

저는 거의 자동기술적으로 술술 낯선 연극을 해석해 내고 있었습니다.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극도 60년대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연극 리빙씨어터도 몰랐던 제가 어떻게 처음 본 연극을 해석해 낼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저는 그때 키 작고 왜소한 모습의 학생 연출가를 우상처럼 생각했습니다. 카랑카랑한 쉰 목소리에 줄담배를 피워대던 선배의 모습에서 시대와 함께 가는 예술가의 초상을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작품이 유덕형 학장의 지도 연출이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저는 13년 만에 다시 연극을 하면서 처음 제게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그 작품을 연출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단막극이라 공연 시간이 30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필로그 형식으로 학살당한 독일어권 시인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뒤에 붙여서 일종의 집단 낭송 형식으로 풀어냈습니다.

공연 사흘 전 자체 리허설을 했는데, 내부 반응이 신통찮았습니다. 가마골 소극장을 같이 사용하고 있던 부두극장 이성규형은 한 마디로 "잘 모르겠다"면서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당시 극장장을 맡았던 이종근(현 동서대 연기예술학과 교수)의 반응은 "막은 올려야지요"였습니다.

첫 공연에 대한 기억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공연이 끝났는데 39분 걸렸습니다. 관객들은 무서운 침묵 속에 짓눌려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공연은 끝났는데 누구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습니다. 한참 기다리다 어쩔 수 없어 제가 나섰습니다. "공연이 끝났습니다." 비로소 관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박수도 반응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냥 조용히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무거운 침묵을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거운 침묵이 상당한 성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연극평론과 연출 작업을 하던 경성대 허은 교수는 신선한 시도로 보았다는 리뷰를 썼고, 당시 객석평론상 제1회 수상자인 경성대 영문과 이현석교수는 저의 두 번째 연출작이 된 '히바쿠샤'(홍가이작) 번역본을 추천해 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태풍 베라호가 와서 광복동 거리에 전신주가 끊어지고 양철 지붕이 날아다니던 날에도 촛불을 켜 놓고 공연을 했습니다. 관객들이 비바람을 뚫고 극장에 와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갑지 않은 손님이 극장에 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공연 금지 처분을 당한 대본이었지만, 1986년에는 민주화 운동이 활기를 띠고 있어서 괜찮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머리 잘린 남자들 사진으로 디자인된 포스터가 거리에 붙자마자 누군가가 모조리 뜯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전투경찰 두 명이 티켓도 끊지 않고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 군화발을 쭉 뻗고 연극을 관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신고도 허가도 받지 않고 공연을 해대기 시작했고, 당국에서는 그 어떤 구체적 압력을 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은근한 위협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듬해 3월, 만나본 적도 없는 소설가 이인성씨 전화가 와서 "우리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인들도 시대적 요구에 동참해야 되지 않겠소" 하면서 30대 문인들 시국선언 서명에 가담해 달라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웬걸, 조선일보에 서명자 명단이 실리자마자 엄청나게 큰 덩치의 형사가 와서 제 허리춤을 달랑 들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서명한 한 적이 없다는 서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제 답변이 지금 생각해도 궁색하고 우습지만, 그것 또한 소박한 제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정치적 주장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 위인이 못됩니다. 저는 단지 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는 제 자발적 동기로 시국선언에 서명했습니다. 지금 안 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결국 저는 사꾸라(벚꽃의 일본어. 변절자를 의미)가 되겠지요. 사꾸라가 될 바에야 차라리 감옥에 가겠소."

연극을 계속 하려면 다시는 그런 정치적 운동에 가담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났더니 어처구니없는 연락이 와 있었습니다. 조사 기관에서 취조를 당하면 몸 다치지 말고 그런 서명 한 적 없다는 서명을 해주라는 고 채광석형의 지침 하달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연극을 시작하면서 심각하게 부딪친 것이 바로 현실이었습니다. 연극은 결국 당대의 상황을 피해갈 수 없다. 연극은 당대 현실에 대한 나름의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하고, 결국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건 응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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