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이맘때 갑작스럽게 현대그룹을 출입하게 됐다. 당시 '왕자의 난'을 겪었던 현대그룹은 그 해 5월31일 정주영 명예회장과 난의 중심에 있었던 두 아들 정몽구 정몽헌 형제가 동반 퇴진한 직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전쟁은 계속됐다. 그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 하면, 기자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기사를 많이 써본 적이 없었다.
경영권 분쟁과 함께 현대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맞이했다. 형제들간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1년이 채 안되어 신기할 정도로 정리가 잘됐다. 유동성 위기의 진원지였던 현대건설에는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클린컴퍼니로 거듭나 이후 10년간 눈부신 성장을 했다.
당시 SK글로벌의 부실문제로 고민을 하던 SK그룹에서 구조조정을 담당했던 한 고위 임원은 "마치 누군가가 '왕자의 난'이라는 시나리오를 만든 듯 현대그룹이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엄청난 부실을 안고 있던 현대그룹에 마치 왕자의 난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자연스럽게 계열분리가 이루어졌고, 그룹의 부실을 현대건설로 몰아넣어 그룹과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 같다는 말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현대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이 채권단으로 넘어간 직후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 역사를 가진 현대건설이 매물로 나올 기미를 보이자 다시 현대가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현대건설을 되찾아 적통을 지키려는 현정은 현대그룹회장의 맞은 편에 현대건설을 정씨 일가가 사수해야 한다는 입장인 정상영 KCC회장, 장자 적통을 주장하는 정몽구 현대ㆍ기아차회장,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로 현대상선 지분을 놓고 현 회장과 지분다툼을 벌이는 정몽준 의원 등이 세력을 규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양측 대결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은 현대그룹의 상징이라는 것외에도, 현대건설이 확보한 현대상선 지분 8.3% 때문이다. 이 지분이 어느 한쪽으로 넘어갈 경우 현대그룹의 주력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이 뒤바뀔 수 있다. 정씨 일가가 소유한 지분과 현 회장쪽 지분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씨 일가 쪽에서는 현 회장이 현대그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못마땅해 할 정도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을 빼앗길 경우 '그룹'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지니 싸움이 치열할 수 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현대그룹이 불리한 상황이다. '실탄'이 없는데다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재무구조개선 약정 압박을 받고 있다. 현대그룹 내에서는'불순한 개입'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나오고 있다. 재무구조개선 약정으로 현대그룹의 손발을 묶은 뒤 현대건설을 정씨 일가에게 넘기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정씨 일가가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분석도 많다. 현대ㆍ기아차는 이미 시공능력 20위의 건설회사 엠코가 있고 현대중공업은 아파트 건설만 안 할 뿐이지 건설능력이 대단하다. KCC도 시공능력 29위의 KCC건설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경제논리가 사라지고 '남 잘되는 꼴보기 싫다'는 이유가 앞설 경우 인수회사는 물론 우리 경제에 심한 역풍이 몰아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 금호그룹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조재우 산업부장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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