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칼·방화에 23명 학살된 유혈의 현장…91년 지났지만 아픔 여전히
'두렁바위 들꽃엔 이슬이 방울방울/ 불에 타고 총 칼에 쓰러진 임들의 한 맺힌 넋이드뇨'
부슬비가 흩뿌리던 지난 3일 오전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堤岩里)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기념비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월북 시인 박세영의 제암리 학살사건 추모시는 그래서 더욱 애끓는 듯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한 마을 주민들이 무더기로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불에 타 숨졌던 제암리 학살사건.
일제의 패륜적 만행과 민족의 저항정신을 증거하는 이 곳의 아픔은 아직도 씻기지 않았다. 91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이곳에 이는 바람이나 안개, 이슬이나 가랑비니 하는 것들이 여전히 넋들의 외침과 눈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두렁바위골에서 벌어진 학살
마을 입구에서 300여m 정도 더 들어가자 '두렁바위골'이라 불리는 제암리 마을의 순국 유적지가 나타났다. 지금은 3만3,000여㎡(1만여평)의 규모로 기념관, 기념탑, 교육관, 순국 묘지 등이 들어서 있는 이 곳은 3ㆍ1 운동 당시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33채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전형적인 시골 촌락이었다.
3ㆍ1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던 1919년 3월말과 4월초, 화성 지역의 농민 시위도 거세게 불붙었다. 송산면 사강리, 향남면 발안리 등 각 마을의 장날에 맞춰 벌어진 평화적 만세 시위는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점차 과격해져 면사무소 방화 등으로 격화됐다. 일제는 시위 주동 마을을 불태우는 등 무자비한 강제 진압의 만행을 벌였다.
일본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헌병대가 제암리 마을에 들이닥친 것은 4월 15일 한낮. 아리타는 "열다섯 살 이상 남자들은 모두 마을 예배당으로 오라"고 했고, 22명의 청장년이 모였다. 그 다음부터 이어진 일제의 만행은 언급하기 벅찰 만큼 끔찍했다.
교회 문을 잠그고 사람들을 가둔 뒤 창문으로 총을 난사했고, 벽을 허물고 뛰쳐나오는 이들은 칼로 찔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배당은 기름을 부어 불태웠고, 울부짖으며 달려온 부인 2명은 그 자리에서 칼로 벴다. 불은 바람을 타고 인근 초가집들을 모두 태웠고 마을 주민들은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예배당에 갇혔던 이들 중 조경태씨만이 유일하게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23명이 몰살된 그 통곡의 자리엔 지금 높이 4m 정도의 우람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 적힌 비문은 '이리 같은 일본 헌병은 칼과 총으로 백의민족을 난도질쳤다'고 일제의 만행을 전하고 있다. 당초 이 자리엔 1959년에 건립된 기념탑이 있었는데, 비신이 작고 모양이 초라하다 해서 1982년 비문 내용은 그대로 한 채 규모를 키운 탑이 새로 건립됐다.
탑에 새겨진 '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란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썼고, 비문은 월탄 박종화가 짓고 여초 김응현이 썼다. 향토사학자인 이길원(67)씨에 따르면, 4ㆍ19혁명 여파로 이 전 대통령의 친필이 적힌 비석이나 현판은 이곳을 포함해 네 곳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기념탑 뒤 언덕으로 오르자 희생자 23명의 유골을 합장한 순국 묘지가 나왔다. 이 묘지도 1982년에 마련됐는데, 희생자들은 당시 마을에서 4km 떨어진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63년이 지나서야 유골 발굴작업이 이뤄져 안치됐다.
학살 만행 세계에 알린 선교사
사건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던 이는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의료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였다. 학살 소문을 듣고 사건 사흘 뒤 현장을 찾은 그는 수시로 제암리 일대를 방문해 마을 주민들을 돕는 한편,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일제의 잔학 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각지로 전달했다. 당시의 참혹상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잿더미로 변한 마을 현장 사진들도 그가 일제 경찰 몰래 촬영한 것이다.
하마터면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이 만행을 조사하고 증언했던 이들이 바로 서구 선교사들이었다. 스코필드에 앞서 사건 다음날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선교사와 레이몬드 커티스 미국 영사 등이 현장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선교사 노블, 케이블, 베크 등이 잇따라 방문했다. 유일한 현장 생존자 조씨는 탈출 후 감리교단에 은신했는데, 그의 증언도 이들의 조사 보고서를 통해 남을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보고서는 미국, 캐나다 등의 교회로 전달됐고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그 해 7월 125쪽 분량의 '한국의 상황'이란 책자로 펴내 일제의 반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스코필드 박사는 개인적으로 각국 언론에 투고하고 일본에 건너가 극동지역 선교사 8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연설을 求?등 일제 만행 폭로에 앞장섰다가 암살 위협까지 받았다.
기념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쪽에 1,306㎡ (395평) 규모로 2001년 개관한 제암리 3ㆍ1운동 순국기념관에는 스코필드 박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업적이 상세히 전시돼 있다.
제국주의 서구의 침묵
하지만 그들의 고발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의 압력으로 서울 주재 미국,영국, 프랑스 영사들이 조사에 나서 본국 정부에 보고서를 보냈으나, 이들 국가에서 공식적인 외교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교회 방화 등에 대한 비공식적인 항의나 소극적인 개선 요구가 전부였다. 이들 나라 역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였던 것이다. 미국도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 식민지배의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 상태였기에 침묵했다.
선교사들도 일제 지배 초기에는 비슷한 입장이었다. 정교 분리, 내정 불간섭이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일본의 한국 지배에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미국의 대표적 초기 선교사인 스크랜턴이 1905년 반일 저항조직으로 커 가던 상동교회의 기독청년단체를 해산시켰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반인도적 만행 앞에서 모른 척 눈 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들의 조사와 증언은 다양한 보고서와 책으로 엮어져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세계에 알렸다. 김승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에 알려지면서 세계 여론이 악화하자 일제도 무단통치를 포기하고 겉으로라도 통치 형태를 개선한 이른바 '문화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화성=글·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하마터면… 제암리 기념비 사라질 뻔
제암리 3ㆍ1운동 순국 유적지에는 세 가지 종류의 기념비와 탑이 남아있는데, 가장 먼저 세워진 기념비는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사연을 갖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기념비는 광복 직후인 1946년 마을 주민들이 건립한 것으로 조촐하나마 제암리 기념 사업의 첫 단추였다. 하지만 극심한 좌우익 대립을 거치면서 비석의 존립 자체가 문제로 떠올랐다. 비문을 쓴 이가 월북 시인 박세영(1902~1989)이었기 때문.
그는 1946년 6월 월북한 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지내고 북한의 애국가 가사까지 작사한 시인이었다. 그가 비석에 쓴 추도시에는 '왜놈은 망하고 인민의 나라 섰으매/ 거친 밤 촉새되어 울던 노래 그치라'는 구절도 있었다. 우익 단체나 군경이 이 비석의 존재를 안다면 가만히 놔둘 리 없는 상황이었다.
향토사학자 이길원씨는 "면 서기관이 기지를 발휘해 철거 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했다. '인민의 나라'의 '인'자에다 철심으로 세 군데를 새로 파서 '한'자로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문제의 시 구절이 '왜놈은 망하고 한민의 나라 섰으매' 로 바뀐 것이다. 기념관에도 추모시가 '한민의 나라'라는 구절로 전시돼 있다. 이씨는 "좌익 척결에 나섰던 군인들이 '인민의 나라'라는 표현을 봤다면 비석을 부숴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념비에 이어서 1959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 불 탄 예배당 자리에 건립됐다. 이 탑은 1982년 규모를 키운 새 탑이 들어서면서 제암리 3ㆍ1운동 기념관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중립' 지키던 선교사들 일제의 불법·불의에 항의할 줄도 알았다
해방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개신교 선교사는 1,500여명이다. 국적별로 보면 미국인이 1,059명으로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영국인으로 199명(13%), 캐나다 출신이 98명(6.4%), 호주 출신이 85명(5.6%)이었다.
당시 캐나다와 호주는 영국연방이었으므로 국적상 영국인으로 본다면 영국인이 382명(25%)으로 영미인이 94%를 차지한다. 소속 교파별로는 장로교 694명(45.4%), 감리교 432명(28.3%), 구세군 127명(8.3%), 성공회 76명(5%), 안식교 28명(1.8%), 성결교 25명(1.6%) 등이었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의 내한으로 이 땅에서 활동을 시작한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 선교와 함께 의료와 교육 등 서구 근대문명의 전달자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이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지 못해 종종 오해와 갈등이 없지 않았으나, 대체로 선교 대상이었던 한국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일제와의 관련 속에서 선교사들이 미친 영향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라는 좌파적 인식 아래,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같은 제국주의 국가인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존재한다. 선교사들이 기독교인들이 항일운동이나 민족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기독교계 내부에서 주장되는 것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와 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의식을 깨우쳐 사회와 민족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에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견해다. 이런 상반된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타당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를 좀더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과 국제정세, 선교부의 정책, 일제의 선교사에 대한 정책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교사는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니라 외국 국적을 가지고 그 나라의 지시와 보호를 받는 외국인이다. 그들에게서 인류 보편적인 인도적 처신 외에 우리 민족이나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나라의 주체적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선교사가 한국에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복음 전도와 교회의 설립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부정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 한 일제와 마찰을 피해 그 목적을 효과적이고 충실히 수행하려는 노력을 우리의 기대와 어긋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매도할 수만은 없다.
대체로 선교사들은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교부의 방침에 따라 정교분리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일제의 지나친 불법과 불의에 대해서는 항의할 줄도 알았다.
일제의 야만적인 3ㆍ1운동 탄압에 대해 "야만에는 중립이 없다"고 하면서 일제에 항의하고 그 진상을 국제 여론에 호소한 것도 이들 선교사들이었다. 일제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배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그들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감시자와 증언자로서의 역할도 감당했던 것이다.
김승태ㆍ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