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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사교육, 실재와 시뮬라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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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사교육, 실재와 시뮬라크르

입력
2010.07.05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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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어에 대응하는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 단어는 실재하는 대상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관계를 언어이론에서는 지시관계(reference)라고 한다. 말이 참인지의 여부를 이 두 관계의 일치에서 따지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이 두 관계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용(龍)은 사실상 상상의 동물이기에 '용은 상서로운 동물이다'라는 문장은 거짓이 된다. 그럼에도 이 문장은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와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의미 있는' 문장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본다면,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 사이엔 어느 정도 틈새가 있다. 실재와 언어 사이의 불일치는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실제 효과와 무관한 소비상품

특히 실재하지 않는 개념이 우리의 지각과 생각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우리는 가상의 질서에 이미 발을 담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확장된 사이버 공간이 버젓이 우리의 경험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때문에, 실재와 가상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일부 현대 철학자들은 이렇게 실재가 아니면서 경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명명한다.

실재와 가상 사이의 모순된, 더 정확히 말해서 뒤바뀐 관계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 상품의 1차적인 목적은 사용가치에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품은 사용가치뿐만 아니라 교환가치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상품은 교환 과정을 경유해야만 그 본질을 획득하게 된다. 요컨대 교환과정에서 자본주의의 가치 증식이 설명될 수 있다.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휴대폰이 신제품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혹은 소비자를 유혹하는 온갖 광고에 의해 폐기 처분된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 소비 패턴이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기능(실재)보다 기능적으로 무용성(無用性)을 지닌 상품(시뮬라크르)이 지배하는 사회가 오늘날 대중 소비사회인 셈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렇듯 눈에 보이는 기호로서의 사물이 중심이 된 소비사회의 상징물을 가제트(gadget)라고 부른 바 있다.

아무런 기능도 갖고 있지 않지만 상품 교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가제트가 사교육 시장에서도 동일하게 작동되고 있다. 물론 사교육을 통한 효과가 없진 않다. 아마도 이것이 1차적으로 사교육이 가지는 원초적인 사용가치일 것이다. 학습자 개인별로 학습성취도 향상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교육 시장의 논리가 이러한 1차적인 사용가치로서 상품의 성격만을 지니고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교육 시장에서의 구매 양상은 가제트의 속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적지 않은 사교육 프로그램이 효과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 제공되는 상품으로서 사교육 프로그램은 그 '순수한' 교육적 기능만을 홍보하지 않는다. 일반 시장과 마찬가지로 교환가치로서 구매에 이르게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학부모 욕망 해소 위한 구매

학부모로서 소비자들은 이러한 광고의 홍수더미 혹은 다른 부모들의 교육열 행태에 전염된 나머지 조급함과 불안에 휩싸인다. 학부모들은 자극받은 욕망을 해소할 목적으로 결국 자녀에게 사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하지만 학부모는 단지 구매 자체로 심리적 위안을 얻을 뿐이다. 우리 학부모들은 교육적 기능에 기초하여 사교육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호화된 가제트를 구매한 것이다.

정말 자녀교육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일은 실재와 시뮬라크르 사이를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교육현실에서 학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처방안은, 필요 없는 사교육 프로그램만이라도 걸러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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