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쇄적인 미녀 스파이의 등장, 비밀스러운 가방 바꿔치기, 그리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구축함과 핵잠수함들의 기 싸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과거에 속한 냉전 시대의 장면들이 아니다. 경제논리가 무력충돌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강대국들이 군축과 화해를 앞세워 겉으로는 미소를 짓은 2010년에 벌어진 일들이다.
6월 말 미국 뉴욕 한복판에선 주류사회에 스며들어 러시아를 위해 수년간 첩보활동을 벌이던 스파이 일당이 체포돼 미국이 경악했고, 비슷한 시간 태평양 건너 동ㆍ남중국해에선 미국과 중국 해군이 핵잠수함과 구축함 등을 앞세워 무력시위를 벌였다. 외신들은 이러한 강대국 간 새로운 대치에 대해 "과거 냉전 시절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며 물밑에서 격화하는 이른바 '신냉전(New Cold War)'시대에 대한 우려를 타전하고 있다.
스파이는 '냉전 시대 유령'
로이터통신은 1일 러시아 스파이 사건에 대해 "냉전 시대는 이미 오래전 끝났지만 그 냉기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첩보전을 보는 듯한 스파이 체포과정이 그 동안 알 카에다와의 열전에 지친 미국인들에게 냉전의 기억마저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로이터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든 간에 이번 러시아 스파이 사건은 거대 국가 간에 고집스럽게 이어져 온 힘겨루기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소련 시절 첩보원을 지낸 보리스 솔로마틴은 "러시아와 미국의 스파이전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으며 절대 끝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냉전이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한 것이다.
러시아 스파이 체포로 어슴푸레 윤곽이 드러난 '신냉전'의 모습은 과거의 냉전보다 복잡하며 대응하기 더욱 어려워 보인다. 3일 미국과 러시아의 첩보전을 '냉전 시대 유령'으로 묘사한 영 일간 텔레그래프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신냉전의 흐름은 경제정보를 왜곡, 우리(영국)가 자칫 러시아의 원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일자에서 "2001년 이후 러시아ㆍ중국에 의한 첩보활동이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는 미국이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면서 활발한 정보활동을 벌일 것으로 판단한 냉전시대 '적국'들의 견제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미-중 남중국해 '군함 시위'
중국, 일본 등의 영토분쟁으로 긴장감이 가시지 않고 있는 동ㆍ남중국해 주변에서 최근 들어 미국과 중국 군함의 움직임이 자주 포착돼 이 지역이 두 강대국의 새로운 냉전 무대가 되고 있다. 4일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지난 주 미 제7함대 소속 핵 추진 잠수함 미시간호, 오하이오호, 플로리다호가 필리핀 수빅만,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섬, 한국의 부산 등에서 수면으로 떠올랐다.
신문은 "중국이 난사(南沙)군도 주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시점에 3대의 미 핵잠수함들이 아시아 항구에서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례적"이라고 전했다.
3일엔 미군 기지 코 앞인 일본 오키나와 근해에서 중국 군함이 무력시위를 이어갔다. 교도통신은 "일본 방위성이 오키나와(沖繩) 본섬과 미야코(宮古) 섬 사이 공해상에서 중국 해군의 미사일 구축함과 프리깃함이 항해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4일 보도했다.
특히 이 해역은 지난 4월 중국 잠수함과 구축함 10여 척이 무리를 지어 훈련을 했던 곳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서해에서 준비 중인 합동훈련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중 언론 신민망(新民網)은 4일 "미 항모 조지 워싱턴호가 모항인 일본 가나가와 (神奈川)현 요코스카(横須賀)에서 출항 준비를 마쳤다"고 전하며 중국정부가 미군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시사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상대국 전산망을 마비시켜라"… 이젠 사이버 전쟁시대
2008년 발생한 ‘러시아ㆍ그루지야 전쟁’직전, 묘하게도 그루지야의 기간전산망이 외부공격을 받고 마비됐다. 러시아가 진짜 전쟁에 앞서 ‘사이버 전쟁’에 나섰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부인하면 그뿐인 ‘사이버 전쟁’의 특성상 공격자를 입증하기는 불가능했다.
‘사이버 전쟁’은 신 냉전 체제에서 새로운 주요 전장(戰場)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이버 군대의 규모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지고 있지만, 중국이 세계 최대인 약 40만명의 ‘사이버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대만 정부는 분석하고 있다.
사이버 전쟁에서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꼽히는 미국도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 공군 우주사령부는 지난달 사이버전을 정식교과로 채택하고, 매년 사이버 작전장교 400명을 양성하기로 했다.
사이버전은 외부로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자제하자는 합의나 협정도 도출되기 어렵다. 실제 지난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했을 때 사이버 전쟁과 관련해 양국간에 ‘작은 비밀’이 있었다고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보도했다. 미 정부는 중국 정부의 해킹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지만, 중국은 간단히 부정하는 전략으로 맞서 논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달 러시아 정부에 사이버전(戰) 군축(軍縮)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답변이 없다.
이런 가운데 사이버 전쟁의 피해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2007년 영국 정보당국은 300개 대기업에 “중국 기관의 해킹 시도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전달했고, 그 해 5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사무실 컴퓨터들이 중국에서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킹 공격을 받았다. 뉴질랜드와 벨기에 정부도 “해킹 공격을 받았다”고 공식 발표한 적이 있다.
‘웹 전쟁 1호’라는 명칭을 얻은 것은 2007년 러시아 소행으로 추정되는 에스토니아 기간전산망 마비 사건이었다. 지난해 한국과 미국 정부기관 홈페이지도 디도스(DDosㆍ분산서비스거부)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주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신냉전의 핵심, 자원전쟁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 새롭게 형성되는 냉전구도의 핵심에는 지하자원이 있다. 과거 냉전이 이데올로기 대립에도 불구 핵전쟁으로 인한 공멸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정면 무력충돌을 배제한 대립으로 표출된 것이었다면, ‘신냉전’은 자원확보를 둘러싼 강대국의 암중모색의 결과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미국은 카스피해 연안국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중동에 이어 두 번째로 지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미 의회는 1999년 ‘실크로드 전략법’을 제정해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 지정학적 이익을 추구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석유 사업에 있어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등에 군사기지를 세운 것은 인접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한 테러 전쟁 수행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중ㆍ러에 대한 견제라는 목적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입장에서 보면 지하자원 확보를 위해 뛰어든 중동지역 전쟁이 결국 자원확보 경쟁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 강화를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구소련 붕괴로 급속하게 대외 영향력을 상실한 러시아는 이후 자국 내 지하자원으로 눈을 돌려 부를 축적했다. 2008년 출간된 에서 저자 에드워드 루카스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북핵문제, 중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필요했던 미국은 러시아가 자원강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눈 감아 줬다”고 기술했다. 이후 러시아는 서유럽에 대해서 가스 및 석유를 차단하겠다는 위협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회복했다. 2008년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과 최근 러시아의 벨라루스 관통 송유관 차단 등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자원확보를 위해 훨씬 더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는 물론 호주, 남미까지 투자나 차관 제공을 통해 자원을 싹쓸이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 수년간 전쟁을 치르는 지역인 이라크와 아프간 등에서도 중국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서도 미국 보다 더 많은 유전개발 계약을 따 내고 있다.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중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느라 중동지역에 발목이 잡힌 사이 중국은 미국의 느슨해진 견제를 뚫고 아프리카 등 신흥국의 자원개발을 독점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이 아프간과 인접한 중앙아시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위해 자원무기화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러시아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전세계 유일한 슈퍼파워’라는 탈냉전 이후 미국의 지위가 점점 퇴색하며 신냉전 구도가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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