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천년 서 있어보니 알겠데. 동강난 몸뚱이 둥치만 남어두… 가고 오고, 또 가는 길. 아주 떠나는 것은 없더라."
2010년, 밑동만 남은 살구나무의 정령 '행매'는 독백한다. 재개발을 앞둔 종로 피맛골에서 내일이면 뿌리째 뽑혀 사라질 그는 이 길에 얽힌 오래된 인연을 떠올린다. 첩의 아들로 태어난 김생과 양갓집 규수 홍랑. 신분 차로 사랑을 포기해야 했던 홍랑은 귀신이 되어 김생과 해후한다. 김시습의 고전소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을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 서민이 고관의 말을 피해 다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피마(避馬)'길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피맛골 연가'가 9월 4~1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피맛골을 철거 중인 서울시가 3년 동안 18억여원을 들여 제작한 작품이다. 피맛골을 그 자체보다 서울의 뒷골목들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조명했다.
연극 '벽속의 요정' 등으로 호평받은 '피맛골 연가'의 작가 배삼식씨는 "출발점은 사라져가는 피맛골에 대한 아쉬움이었다"며 "600년 넘도록 서민들의 삶을 품어온 이 길이 물리적으로는 없어지지만 작품을 통해서라도 기억돼야 할 것 같았다"고 창작 의도를 밝혔다. "평소 금오신화를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는 그는 "한양에 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세시풍습과 성북동 복사꽃밭 같은 모습도 작품 속에 담으려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한국무용 전공자를 비롯한 60여명의 출연진이 벌이는 유가(遊街ㆍ과거급제자들이 시가를 행진한 풍습)행렬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물은 아니다. 귀신과 사람의 사랑을 그리거나, 시대를 넘나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판타지에 가깝다. 음악과 안무도 퓨전이다. 국악과 양악을 동시 편성한 26인조 오케스트라와 재즈댄스, 힙합을 가미한 춤은 지극히 대중적이다.
연출은 유희성 전 서울시뮤지컬단장이 맡고, 창작뮤지컬에서 활약해온 장소영, 이란영씨가 각각 음악감독과 안무를 담당했다. 양희경, 박은태, 조정은씨 등 출연. 티켓은 대극장 뮤지컬 평균 수준에 비하면 다소 낮은 2만~5만원이다. (02)399-1114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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