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스 해링 지음ㆍ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발행ㆍ492쪽ㆍ2만2,000원더 나은 세상 만들기 위한 열정 가득
키스 해링(1958~1990). 혹 이름은 낯설더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티셔츠나 공책 표지에도 자주 등장해서 낯이 익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 싶게 단순한 선과 형태, 경쾌한 원색이 특징이다.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아기들이 기어다니고, 개가 컹컹 짖고, 춤꾼들이 인간탑을 쌓고, 광선총을 든 인간의 심장으로 다른 인간이 들어가고, 비행접시와 피라미드가 교신하는 등 만화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장면들이 많다.
그는 1980년대를 풍미한 팝아트 미술가다. 뉴욕 지하철의 빈 광고판에 낙서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나중에는 록스타만큼이나 유명해져서 미국과 유럽, 일본을 바쁘게 날아다녀야 했다. 동성애자였고, 에이즈로 죽었다.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함 속에 독자적 개성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는 생전에 큰 사랑을 받았다. 쉬워 보이는 그림들이지만,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까지 그가 쏟은 열정과 오랜 고민은 엄청났다. 키스 해링의 일기인 이 책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기는 뉴욕의 시각예술학교 학생 시절인 1977년부터 시작한다. 당시 열아홉 살밖에 안됐지만, 예술가로서 분명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삶에 내 삶을 끼워 맞추려 한다면 내 삶은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이미 존재한 삶을 반복하며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편견과 착각을 모두 떨쳐내고 그저 살아가고만 싶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죽을 때까지."
예술의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는 태도는 스무 살 때 일기에서 이미 분명해진다. "대중에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예술은 만인을 위한 것이다.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예술을 고집스레 추구하는 것은, 자기를 과시하는 허튼 수작이다."
젊은이다운 호기심과 왕성한 탐구열로 그는 많은 책을 읽고, 동시대 예술을 열심히 관찰하고, 친구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한다. 진지한 예술론과 사소한 일상의 에피소드, 읽은 또는 읽으려는 책 목록이 뒤죽박죽 섞인 일기에 열정에 넘쳐난다. 에이즈로 죽기 다섯 달 전에 쓴 마지막 일기까지, 그는 유쾌한 정열과 천진난만한 낙관을 잃지 않는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온 몸에 돋아난 종기와 갈수록 떨어지는 기력에 슬퍼하면서도.
예술가의 일기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작품 설명은 없다. 의도적인 회피다. 그는 모든 예술은 관람자의 해석으로 완성되는 것이지, 작가 스스로 설명하거나 정의해서 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이 책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불안정한 충동과 예술에 대한 의지가 엇갈려 나타난다. 그는 성적인 방종과 예술적 엄격함을 나란히 유지하는 가운데, 핵무기와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에이즈 추방 운동에 앞장서고, 자선기관과 병원, 탁아소, 고아원을 위해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다. 이 책을 읽고 감동하는 것은, 참된 예술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열렬히 탐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청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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