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죽산 조봉암 사건에 대해 2년째 재심 개시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는 이 사건의 특수성이 자리잡고 있다.
우선 죽산이 사형을 당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1958년 1심 법원은 죽산의 간첩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징역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은 간첩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사형을 선고했다. 엇갈린 하급심 판결에 대해 대법원은 일부 혐의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면서도, 사건을 원심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판결했다. 수기로 작성된 1,059쪽 판결문을 통해 대법원은 죽산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게다가 대법원은 죽산의 재심청구도 기각했고, 검찰은 그 다음날인 59년 7월31일 곧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일반적인 사건과 달리,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스스로 판결[파기자판ㆍ破棄自判]한 경우여서 하급심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에 곧바로 재심이 청구됐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하급심에서 해야 할 사실관계 심리를 한 뒤 이를 토대로 재심을 개시할지 먼저 결정하고, 이후 유ㆍ무죄를 다시 판단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판사도 "법률심인 대법원이 증거조사가 어려운 재심사건에서 사실심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에 사건을 담당하는 연구관 입장에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죽산이 48년 헌법 제정 이래 첫 번째 '사법살인' 희생자로 꼽히는 데다, 주심을 맡은 대법관이 여론의 비판에 강하게 반발했던 것도 대법원을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당시 언론들이 죽산의 사형 확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자, 이 사건 주심을 맡았던 김갑수 당시 대법관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정치적 판결이 아니었다"는 내용의 글을 연재했다. 또 자신의 책 을 통해 이 사건을 정치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판결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재심을 통해 후배 대법관들이 선배 대법관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조봉암 사건은 역사적 가치나 사안의 중대성으로 인해 재판연구관들의 세심하고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사건이 향후 재심사건의 판례가 된다는 점 역시 대법원이 장고를 거듭하는 이유로 분석된다. 지금까지 재심사건들은 대법원의 판단을 받기 전에 하급심에서 검찰의 항소 포기 등으로 확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법관들조차 이번 사건의 진행상황을 예의주시해왔다. 한 고위 법관은 "전례가 없는 대법원의 직접 심리는 앞으로 있을 재심사건의 판결의 잣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법관은 "검찰로선 대법원이 바로 심리하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해 상소할 수도 없다"며 "또한 진보진영의 선구자인 조봉암에 대한 재심은 이념적으로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대검찰청이 강도 높은 재심 반대 의견서를 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해석된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의 고심을 이해하지만 재심 개시여부를 조속히 결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재경 법원의 한 판사는 "정의의 지연은 불의라는 말은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줄곧 듣던 경구"라며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이 청구 4개월 만에 개시결정이 내려진 점에 비춰 이번 사건은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에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인사도 "당시 판결 기록만 읽어보면 누구든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며 "대법원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권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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