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격동의 시대는 역시 삼국시대라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 동북 3성인 지린성(吉林省), 라오닝성(遼寧省), 헤이륭장성(黑龍江省)을 차지하고 한강이북의 땅을 영토로 하는 강국이었고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충청과 호남지방을, 그리고 신라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분을 영토로 하면서 서로 견제했던 시기였다. 더구나 고구려는 고조선 이래로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길림성 지안(集安)의 고구려유적은 우리나라에 너무나 잘 알려졌기 때문에 1992년 중국과 수교 후 많은 사람이 관광과 학술연구차 방문했고 지금도 그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안 전체가 고구려의 유적이지만 그 가운데 특히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 그리고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있는 지역은 우리나라와 수교 후 정비해서 입장료를 받고 공개하고 있다.
서기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5m에 무게 수 십 톤에 달하는데 보기만 해도 그 웅장함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삼국시대뿐 아니라 이 광개토왕비가 세워질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거대한 비는 마련되지 않았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고구려의 탄생과 광개토대왕의 영토 정복에 관한 것으로,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당국에서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이것 역시 남의 역사를 자신의 문화유산으로 만드는 중국의 문화정책임을 알 수 있고, 또 이 모든 것이 중국이 추진 중에 있는 소위 동북공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즉 중국의 역사는 만리장성 밖은 소위 자국의 문화인 중화문화로 보지 않고 오로지 오랑캐 문화로 보아왔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금의 중국영토에 속하는 곳의 옛 문화도 모두 중국의 한 지방 문화라는 인식이 바로 동북공정의 근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찬란했던 우리의 고구려 문화 역시 이제는 중국의 문화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은 비에 대한 일체의 사진촬영과 탁본을, 공개된 지 20여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못하게 하고 있는 일이다. 실내 전시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촬영으로 인해 비석이 상할 리도 없기 때문에 이는 납득하기 힘든 조치다.
현재 비석의 금간 곳을 비롯 일부 회를 발라 비문을 다시 써넣은 것에 대한 해석이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 모두 제각각이다. 그래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지금은 보존과학이 발달되어 바른 회도 비의 손상 없이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제거한 후 정밀조사를 통한 3국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촬영도 못하게 하고 공동조사도 안 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제 광개토왕비는 3국뿐 아니라 세계가 공동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다. 3국의 공동연구는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역사를 바로 보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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