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신문사를 그만 두면서 꿈꾼 것은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유랑극단 형태의 연극집단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 말을 가로질러 가는 현대판 남사당패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나이 서른 다섯에 이른 남자가 가족과 직장을 등지고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방랑벽이 제 의식 속에서 싹텄고, 그래서 저의 꿈은 철저하게 저 혼자만의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제가 부산 해안 끝머리 어촌 대변마을에 당도한 것도 저 혼자만의 길찾기의 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3박 4일간 민박하면서 동해안 별신굿을 처음 접하게 되면서 제 삶은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저는 그곳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한국연극의 원형이 굿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구체적인 몸짓과 장면으로 목격한 것이지요. 동해안 별신굿 중 마지막 거리인 거리굿은 1인의 무당이 간단한 일상용품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역할을 바꿔 나가는 거리극(street theatre)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 남자 무당이 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면 삼신 할머니로 변신합니다. 바가지에 짚을 한 묶음 연결하여 꼬면 짚 인형으로 된 아이가 됩니다. 짚을 꼬아서 팔 다리를 만들고 마지막에는 아이의 잠지까지 만듭니다. 짚과 박 바가지로 만든 인형을 치마 속에 넣고 "아야야......" 익살 맞게 신음을 하면 바로 임산부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변신의 과정이 관중이 보는 앞에서 간단한 일상 도구를 이용하여 진행된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아주 간단 명료하게 넘나드는 한국 전통연희의 연극성을 만나게 됩니다. 무대 공간에 대한 이동도 간단한 연극적 약속으로 진행됩니다. 부채 한번 탁 치면서 한 바퀴 팽그르르 돌고 나서 "저기 경복궁이 보이네" 그러면 벌써 서울에 와 있는 셈이지요. 구차스럽게 무대를 만들고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서구의 사실극이 엄청나게 크고 디테일한 무대장치를 요구하고, 중국 일본 인도 등 동양연극 또한 화려한 장식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한국 연극은 그냥 일상적안 삶 그 자체가 무대가 됩니다. 바로 삶의 마당이 연극무대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의상이나 소품 또한 박 바가지 짚 갓 등 일상도구가 연극적 약속에 의해 연극 소품으로 용도 변경 됩니다. 저는 이런 한국연극의 특성을 '삶의 연극성'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다시 연극을 시작할 수 있는 창조적 동기가 되어준 것이지요.
저는 일단 굿을 무대 공연양식으로 재현해 보고 싶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신문사 동료였던 문화부 문화재 담당 김철하 기자에게 당시 무형문화재 82호인 김석출 선생과의 만남을 부탁하게 되고, 굿을 무대에 올려 보고 싶다는 저의 제안을 김석출 선생은 흥미롭게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1986년 4월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동해안 별신굿이 국내 최초로 무대에서 재현됩니다. 강릉 단오제를 주재하셨던 신석남 선생이 쾌히 합류하셨고, 영덕 포함 등지의 별신굿 보유자들까지 모두 모여들어 총 34명의 연희무당들이 무대에 오릅니다.
국내 최초로 대규모 굿이 무대 위에서 재현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 이 공연은 대박이 터집니다. 공연일이 수요일 평일인데도 첫회 4시 공연에 2,200명 저녁공연에는 2,400여명이 몰려 와서 관객을 무대 위에 까지 앉히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신이 난 김석출 선생은 저녁공연 때는 거리굿 시간을 삼십분이나 연장하면서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해학과 골계미를 선보입니다. 단 하루 공연에 유료관객 4,000명 이상을 끌어 들였으니 엄청난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부산문화회 기획으로 진행된 별신굿 무대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저는 즉각 독자적인 극단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극단 명칭을 연희단 거리패로 정한 것은 극단이란 단어 자체가 서구 연극장르의 명칭이고, 한국 연극의 원형은 연희란 명칭이 적절하다는 판단이었고, 거리패라 이름 붙인 것은 거리굿이 우리 연극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저는 6년 6개월 동안 신문사에서 근무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 660만원 전부를 털어 넣어 가마골 소극장 간판을 내겁니다. 부산 광복동 입구에서 용두산 공원을 오르는 계단길에 위치한 부산고등기술학교 낡은 목조건물 20평을 세내어 13년 만에 다시 연극작업 둥지를 튼 것이지요.
소극장 시설을 해 나가면서 저는 6월에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오태석 작 연출 '춘풍의 처'의 초청 공연을 기획합니다. 담임이셨던 오태석 선생에게 옛 제자가 다시 연극을 시작했음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13년 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시험공연 과정을 거치고 싶었습니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연극을 해서 먹고 살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5일 간의 공연을 통해 3,000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합니다. 당시 예술성은 높게 평가 받고 있었지만 난해해서 관객을 기대하지 않았던 극단 목화는 부산에서 대박이 터지는 이변에 놀랍니다. 특히 '춘풍의 처' 공연 당시에는 바로 옆 대극장에서 당시 최대의 흥행작인 청소년 뮤지컬 '방황하는 별들'이 공연 중이었고, 시민회관 소극장 바로 앞 프로그램은 당시 또 다른 흥행작 '품바'가 공연 중이었습니다. '춘풍의 처' 뒤에는 역시 화제작이었던 '관객모독'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앞 뒤 옆으로 당대의 흥행작들과 경쟁하면서 초청 공연을 기획했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흥행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불패의 기록을 세웁니다. 대신 저는 쌍권총이란 별명을 얻습니다. 아는 사람이면 모두 찾아가 연극 티켓을 팔아줄 것인가 광고 스폰서를 해줄 것인가를 강요하는 공연 기획자 역할을 해낸 것이지요. 내 왼쪽에는 연극 표가 있고, 오른 쪽에는 광고 협찬 의뢰서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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