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고 시절 ‘제2의 이종범’이라는 찬사를 받은 유격수가 있었다. 연고구단 LG는 2억8,000만원이나 쥐어주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1997년 매스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LG에 입단한 손지환(32)이다.
하지만 프로에서 그의 야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될 듯 될 듯 했지만 한 뼘이 모자랐다. 주전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던 그는 결국 2003년 말 자유계약선수(FA) 진필중의 보상선수로 LG에서 KIA로 이적했다.
KIA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꽃피우는 듯했다. 2007년에는 올스타 팬 투표로 ‘베스트 10’(2루수 부문)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다시 보따리를 싸서 삼성으로 옮겼다.
삼성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그는 2008년 말 방출됐고 2009년 SK를 거쳐 올해 초 일본독립리그의 한국팀인 ‘코리아 해치’에 입단했다. 그러나 파행운영 끝에 코리아 해치는 해체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야구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하기로 했다. 삼성 시절 인연을 맺었던 한대화 한화 감독이 손길을 내밀었다. 보름 전인 지난 8일 한화에 합류한 손지환이 ‘제3의 야구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늙어서 후회할까 봐 놓지 않는 야구의 끈
지난해 말 SK에서 방출된 뒤 손지환은 고민에 빠졌다. 야구 말고 다른 일을 해도 얼마든지 잘할 자신이 있었다. 아마추어에서 코치를 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손지환은 프로야구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돈을 많이 벌 자신은 있더라고요. 실제로 야구인 출신 중 그런 친구들도 있고요. 그렇지만 지금 그만두면 늙어서 후회할까 봐 다시 시작한 거죠.”
방출 충격에 홈페이지도 폐쇄
손지환의 미니 홈페이지는 현재 ‘휴업’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폐쇄됐기 때문이다. “SK에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가을부터 스프링캠프 때까지 하루도 안 쉬었으니까요. 그런데 2009년 스프링캠프 때 발목이 부러지는 바람에 모든 게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시즌 후 방출 통보를 받았을 때 받은 충격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죠.”
어머니의 눈물로 다시 시작
손지환은 서울 인헌초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SK에서 나올 때 어머니가 저보다 더 아쉬워하시더라고요.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시는데 ‘여기서 그만두면 불효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코리아 해치가 비록 실업야구이지만 거기서 잘하면 한국프로에서 다시 기회를 잡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니맨? 제 탓이죠
“저니맨(떠돌이)라는 별명에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요? 하지만 다 제 탓이니 그냥 받아들이렵니다.” 한화가 6번째 팀인 손지환에게는 ‘저니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손지환은 “한화에서 안 된다면 더이상은 기회도 없을뿐더러 알아서 그만두겠다”며 “매일매일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뿐”이라고 말끝에 힘을 실었다.
수비 불안? 한 곳만 하면 문제없어
늘 손지환을 따라다니는 불명예 하나, 수비 불안. 손지환은 그러나 “편견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솔직히 저처럼 내야 이곳 저곳 옮겨 다닌 선수는 많지 않을 겁니다. 2루면 2루, 3루면 3루 한 곳만 맡는다면 기본은 할 자신이 있어요. 한화에 합류한 뒤로는 3루 수비훈련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눈물 닦아주는 팬들 위해서 재기할 것
28일 한화에 입단한 소식이 알려진 직후 손지환은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대부분 팬들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홈페이지도 폐쇄하고 전화번호도 바뀌었는데 어떻게들 알고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너무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97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분들도 계세요. 제 눈물을 닦아주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재기할 겁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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