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총재로 부임했을 당시 부총재는 박철, 부총재보에는 이성태 강형문 이승일 최창호 이재욱, 감사에는 김우석 씨였다. 모두 나보다 7년 이상 후배 되는 사람들이었다. 금융통화위원은 남궁훈 김태동 김병일 최운열 이근경 그리고 한은 추천으로 김원태 씨 등이었다. 나는 총재로 내정되었을 때 구상했던 네 가지 과제 즉 내부개혁, 한은법개정, 화폐제도 개혁, 남북 화폐통합연구 등을 추진하기 위하여 박철 부총재 중심으로 각각의 특별추진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취임과 더불어 내부개혁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우선 정책입안에 외부의 의견을 수렴할 장치가 없었다. 그래서 은행장들로 구성되는 금융협의회와 학계 및 연구소장들로 구성되는 경제동향간담회를 발족시켰다. 이 두 모임은 매달 한은에서 조찬을 겸해 모이는데 금융협의회는 은행장들의 현장 목소리를 통화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장치이며 경제동향간담회는 학계와 연구소의 경제전망과 정책방향에 대한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장치이다. 이 두 모임은 한은의 정책수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한은은 전통적으로 인사 면에서 순혈주의를 지켜왔고 직원들의 신문 방송 등 대외발표를 금기시 해왔는데 이를 개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학술적 활동뿐 아니라 신문 방송 등 대외발표를 자유화하고 장려하였으며 다소 한은에 불리한 내용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인사의 문호를 열어 일부 고위직과 여러 분야의 전문직을 외부에서 수시로 영입했다. 여기에는 박사학위인력 전산전문직 외화자산운용전문직 어학특기자 등이 포함되었다.
한은의 인사는 매우 공정하다는 전통이 있는데 특히 나의 재임 중에는 지연 학연 혈연 등 정실이 완전히 배제된 인사를 했으며 단 한건도 외부의 청탁이나 압력이 작용한 일이 없었다. 나의 중앙대 제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취임하자마자 모이도록 해서 어떤 경우에도 인사상의 혜택을 기대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잘 수행하려면 한은을 국내 최고의 인재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내외 학술연수를 거의 배로 대폭 확대하여 매년 30-40명의 직원을 국내외 학위과정에 내보냈고 국제금융기구 등 해외 연수기회도 거의 배로 늘렸다.
한국은행의 직원채용시험 결과를 보면 매년 서울의 일부 명문대학이 독점하고 지방대학의 진출이 끊어진 지 꽤 오래 되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지방의 각 직할시 및 도별로 그 지역경제 연구를 전담하는 '지역경제전문직' 제도를 신설하여 그 지역 출신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어 뽑았는데 그렇게 뽑힌 직원은 더욱 헌신적으로 일을 해서 이 제도를 다른 기관이 벤치마킹해 갔다.
한편 2,000명이 넘는 직원 중 정식 채용시험을 거쳐 들어온 여성 직원의 수가 20명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들의 진출을 넓히고자 채용과 인사 면에서 우대조치를 했으며 특히 해외 학술연수에는 여성쿼터를 따로 주었다. 그런데 불과 3-4년 뒤 여성들의 진출이 크게 늘어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을 보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빠르게 향상되고 있는가를 실감했다.
한은의 조직은 없애거나 줄여야 할 조직 그리고 새로 만들어야 할 조직이 많아서 급격한 업무환경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기준 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조직개혁추진팀을 발족시키고 이 팀의 직무분석과 외부 컨설팅 결과를 종합하여 2003년 7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 조직개편으로 전체 조직의 약20%인 23개 팀을 폐지하여 대 팀제도로 이행하였고 직제구조를 10단계에서 6단계로 축소하였다.
경제조사와 예측기능을 확충하기 위해 조사국과 통계국의 업무기능을 재정비 확충하고 특히 경기예측업무를 대폭 강화하였다. 금융경제연구원은 원장을 국장급에서 부총재보 급으로 올려 정해왕 전 금융연구원장을 영입하고 준 독립기구로 격상시켰다. 여기에 북한경제팀을 신설하여 북한경제와 남북화폐통합에 대해 연구토록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보유외환이 늘어남에 따라 그 운용역량을 키우기 위해 운용조직과 인원을 확충하고 현대화된 외환거래실을 새로 마련했으며 뉴욕과 런던에 운용데스크를 신설하였다.
2005년 3월에는 국민들에게 경제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경제교육센터를 발족시키고 초대 원장에 김학렬 국장을 임명했다. 센터에서는 교재편찬과 교수양성 등 준비를 마치고 학생과 군경 교사 시민 등을 상대로 전국적인 경제교육을 시작했으며 나도 경복고등학교에 나가 강의를 했다. 2005년만 하더라도 이 교육을 받은 사람이 32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반응이 매우 좋았다.
2003년 10월에는 북경사무소를 개소하였으며 한국 경제와 한국은행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2005년부터는 한국뵉敾?중앙은행 국제컨퍼런스를 매년 서울에서 주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일본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외환 위기에는 도합 220억 달러까지 서로 빌려주기로 하는 통화스왑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은행의 업무가 불어남에 따라 사무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는데 소공동 한은 바로 옆에 있는 구 상업은행 건물을 한은의 다른 재산과 교환하여 취득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했고, 후암동에 있는 직원 기숙사도 헐고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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