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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0> 이이와 이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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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0> 이이와 이준경

입력
2010.06.2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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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와 이준경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이는 사림의 대표로 선조와 같이 개혁의지가 있는 왕이 있을 때 밀어부쳐야 한다고 여겼는데 비해, 이준경은 노성한 재상으로서 신진사림의 과격한 개혁의지를 견제하지 않으면 구신들에 의한 또다른 사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개혁에는 동의하지만 급히 하느냐 서서히 하느냐의 차이이다.

선조가 즉위하자 새로운 인재를 많이 기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이 유성룡 기대승 정철 등 많은 인재들이 정계에 진출했다. 이이는 당시를 난세 끝에 천명을 받은 사람이 나와서 나라를 창업해 다스림의 시대로 이행하는 때로 보았다. 그러므로 일대 개혁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풍조는 조종의 법을 묵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이는 토붕와해(土崩瓦解)와 같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시의(時宜)에 맞는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이 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나와서 돕고, 그렇지 않으면 산림으로 돌아가 후진이나 기르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준경은 정치적 상황이 어떻든 왕을 도와 경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출처관이 이렇게 다르니 두 사람 간에 충돌이 없을 수 없었다. 1569년(선조 2) 9월 영의정 이준경은 을사사화와 안처겸(安處謙) 옥사에 희생된 사람을 신원하자고 주장했다. 이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준경은 명종이 관련되어 있고, 당시의 가해자들이 살아있어 반발할 수 있으니 서서히 단계적으로 하자는 것이고, 이이는 옳은 일인데 지체해서는 안 되고, 그 때 공신호를 받은 사람은 위훈(僞勳)이니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이준경이 승지가 왕을 직접 면대하는 것은 체통이 없는 일이라 비판하자, 이이는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무슨 말을 했는지가 문제입니다. 승지도 역시 경연관이니 왕을 면대하는 것은 그의 고유업무에 속하니 이준경의 말이 고집스러운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니 이이가 계속 정부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백인걸이 평소에 이준경을 볼 때마다 이이가 어질고 재주가 있어 쓸만하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이이가 왕 앞에서 두 번이나 자기 말을 꺾어버리자 이준경은 "그대가 말한 이이는 어쩌면 그리 말이 가벼운가?"라고 비판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이이는 해직되어 강릉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부딪친 것은 이준경의 유차가 올라왔을 때다. 이준경이 붕당을 지은 사람이 있으면 입궐해서 발본색원할 것이지 있지도 않은 붕당을 은어(隱語)를 써 가며 죽기 전에 여우나 도깨비처럼 있다고 지껄여 사림을 어육을 만들려 한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옛 사람들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했는데, 지금 사람(이준경)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악하다"고 호되게 몰아붙였다. 그러니 삭탈관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히 원수처럼 배척한 것이다. 그러나 3년 뒤에 이준경의 예언대로 동서분당이 일어났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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