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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간 한국전쟁' 저자 박찬승 교수 "민간인 사이 학살, 이념만으로 설명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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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간 한국전쟁' 저자 박찬승 교수 "민간인 사이 학살, 이념만으로 설명 안돼"

입력
2010.06.2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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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대략 군인 44만명, 민간인 65만명이다. 후방에서의 민간인들의 희생이 더 컸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각 지역의 마을공동체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 연구서인 (돌베개 발행)의 저자 박찬승(53)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많이 희생되며, 한반도처럼 좁은 지역에서는 그 피해 양상이 전면화된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초부터 10여년 동안 전남, 충남의 5개 마을을 중심으로 생존자들의 구술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배경을 다각도로 분석한 박 교수는 "역사학자로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는가보다는 왜 그렇게 많이 죽었을까에 관심이 갔다"고 집필 동기를 설명했다. 수십년 동안 금단의 영역이었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는 1999년 AP통신의 노근리사건 보도로 공론화됐고, 이듬해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서 가 나오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이 분야 연구는 주로 군의 빨치산 토벌이나 보도연맹원 처형 등 국가권력의 직접적 개입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집중됐던 것이 특징. 그러나 박 교수는 민간인 대 민간인 사이의 충돌과 학살 양상을 주목하고 그 원인을 다각도로 파고들었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는 그 원인을 일제강점기의 지주-소작인 갈등 등 계급갈등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전쟁 당시 농촌사회의 문맹률은 90%가 넘었다"며 "당시 농촌사회 구성원들은 계급의식이 뚜렷했을 리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변별할 능력도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학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지주-소작인 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친족 내부의 경쟁의식으로 인한 갈등, 과거 양반들과 평민들 사이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대립, 마을공동체 사이의 경쟁심리 등이 잠복해 있다가 전쟁이라는 광기의 시대에 대규모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가와 면장 등 지역사회의 중심인물을 많이 배출했던 씨족과 그렇지 못했던 씨족들이 지역사회 내에서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다가 전쟁기에 골육상쟁을 벌인 전남 진도의 한 마을, 조선시대에 각각 반촌과 민촌으로 신분갈등이 잠재해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학살과 보복을 되풀이한 충남 부여의 마을 등이 그 사례다.

갈등은 늘 있었지만 지역사회 내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

한국전쟁 시기에 왜 깨어졌을까?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국가권력이 지역사회의 내부갈등을 간접적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북한의 국가권력이 동족마을 주민들에게 서로 충성을 요구했고 그 표시로 엄청난 골육상쟁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전선의 밀고당기기에 따라 남한 권력은 청년단과 경찰의 협동으로 좌익세력과 그 가족들을 말살하려 했고, 북한 권력은 주로 머슴이나 빈농 등을 부추키는 형태로 우익에 대한 학살을 방조했다.

박 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지역사 연구가 계기였다. 전남대, 충남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0년대 지역사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연구하다가 촌로들로부터 한국전쟁기의 학살과 관련된 사연을 듣게 됐고 연구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민주화의 진전과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대에야 비로소 생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더라"며 "그나마 우익과 관련된 분들로부터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좌익과 연관된 집안분들로부터는 문전박대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집필과정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증언을 중심으로 하되 일제강점기부터의 마을 통계연보, 족보, 토지대장, 재판기록과 신문기사 등을 동원해 빈 곳을 채워넣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는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미소의 냉전이 마을 단위까지 내려온 국제전이자 내전으로, 외부의 힘을 당시 마을 단위에서 막아낼 역량이 없었다"며 "이 시기에 빚어진 민간인 학살의 참극은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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