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위안소 상하이에 집중분포… 일부 日 침략 증거물로 영구보존
로마제국에도 군인을 위한 '위안 체제'가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전시에 성을 목적으로 여성을 착취해온 역사는 뿌리가 깊다. 그러나 군대가 직접 위안소를 고안해 추진한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독일뿐. 이들은 명분없는 전쟁 중에 자국과 점령지 여성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특히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직후부터 식민지였던 한국의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자국군의 성노리개로 삼는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21일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로 추정되는 '다이이치살롱(大一沙龍)'을 비롯해 무려 158개의 위안소가 있었다는 중국 상하이를 찾았다. 국내 위안부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 연구원인 무라야마 잇페이(村山一兵ㆍ30)씨와 동행했다.
국내에도 대구, 부산, 인천, 평양 등지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증언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장소가 특정되지 않아, 현재 일본군 위안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상하이와 일본의 오키나와 정도다. 상하이는 위안소가 처음 생긴 곳인 동시에 집중 분포됐던 지역이기도 하다.
일본군이 이곳에 있던 일본식 요릿집 4곳을 '해군 특별 위안소'로 지정하면서 '위안부'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개발의 여파로 상하이의 대부분의 위안소는 폐허가 됐거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위치를 확인하고 찾아간 옛 위안소 건물을 부순 거리마다 엑스포 현수막들이 나부낄 뿐이었다.
그나마 훙커우(虹口) 둥바오싱(東寶興)로 125롱(弄)에 위치한 '다이이치살롱' 건물 다섯 채는 외벽이 잘 보존된 상태였다. 건물 내부는 상당히 낡고 초라했다. 빛도 잘 들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무로 된 복도와 계단은 바닥이 조금 떠서 밟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건물 한 채에 무려 36가구가 사는 이른바 쪽방촌으로 전락한 이 곳에서, 79년 전 건물 앞으로 전차가 다니고 불야성을 이루던 풍경은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1931년 11월 문을 연 다이이치살롱의 처음 모습은 일본식 주점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 1층 단칸방에 사는 옌이린(嚴乂琳ㆍ78)씨는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주로 딸들이 시집간다'(옌이린씨는 이 노래를 일본어로 불렀다)는 노래에 맞춰 10~2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고 둘씩 짝을 지어 마당에서 춤을 췄어. 매일 술판, 노래판이 벌어졌지. 담장이 높았지만 일본 해군장교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다들 이곳이 뭐 하는 덴지 알고 있었어. 어린 여자들이 도망도 못 가고…. 마을 어른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여자들이랬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그는 "근방에서 내가 본 조선 여성만도 20~30명이었다"며 "1945년 8월 30일 정오가 돼서야 여자들은 자유의 몸이 됐다"고 말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 선언을 한 지 2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초창기 위안소는 주로 매춘부로 일하던 일본, 조선인 여성을 인신매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상황이 급변한 건 대륙 침탈을 꾀한 일본군이 강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부대 내에 '위안부단' 설치를 추진하면서부터. 여성들의 절대 수도 부족했거니와 사실상 성노예였던 탓에 일본은 자국민이 아닌 식민지 조선과 점령지의 여성들을 사기, 인신매매, 납치 등의 방법을 통해 전장으로 끌고 왔다. 대부분 교육수준이 낮고 궁핍한 여건에 처해있던 여성들이었다. 학계에서는 위안부단의 총 규모를 5만~30만명, 그 중 8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중국식 속어로 질(䏄)을 가리키는 '삐'라고 불리며 군 직영 혹은 업자가 운영하는 위안소에서 성 노동을 강요당했다. 조선인이 직접 경영한 위안소도 적지 않아 1939년 10월 기준으로 상하이에는 이들 소유 업소가 11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무라야마씨는 "그들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악용해 같은 민족을 착취했다"며 "단 조선인 경영자를 비난하다 보면 일본의 야만성과 식민지 체제의 문제점을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명분으로 내세운 강간과 성병의 발생빈도는 줄어들었을까. 초창기 위안소를 고안했던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국파견군 사령관은 1938년 "제6사단의 경우 위안부단을 동행하면서도 강간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성병 신규 감염자도 1942년 1만1,983명에서 1943년 1만2,557명, 1944년 1만2,587명으로 오히려 증가 추세를 보였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일본의 사실 은폐로 인해 위안부 문제는 오랫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1991년 김학순(1997년 사망)씨의 증언이 시작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일부는 학살됐고, 끊임없는 밑바닥 삶이 이어졌다. 여성 기능을 상실했기에 생존해있던 위안부 출신 다수가 홀몸이거나 수양자식을 두고 있던 것도 명백한 상흔이었다.
그동안 공개된 234명의 피해자 중 현재 생존자는 84명(북한은 10명). 지금까지 일본에서 열린 위안부 관련 재판은 모두 피해자가 패소했다. 재판부는 피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공소시효가 지났고 당시 일본제국에는 개인이 국가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또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식민지 지배 책임은 정리됐다고 말한다. 호혜적 차원에서 '국민기금'을 조성했을 뿐이다.
무라야마씨는 "한국 정부와 각종 단체들의 반성도 요구된다"며 "은연 중에 설정한 위안부 모델과는 다른 증언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아 할머니들의 증언이 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매춘부 출신 위안부도 같은 피해자입니다. 식민지, 가부장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팔려간 여성들이 느꼈을 치욕이 여느 여성과 달랐을까요. 일본 보수세력은 달라진 증언은 효력이 없다고 공격합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세요. 그것이 역사이니까요."
상하이=글^사진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가장 아픈 근대사인 일본군위안부 문제통해 인권의 소중함 알려야
이제는 익숙해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2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일제 시기 말에 정신대로 끌려갈 뻔했던 한 연구자와 일본인의 매춘관광 반대운동을 하던 교회 여성들이 만나 우리 여성 유린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낸 것이 시작이었다. 1980년대 말 민주화와 더불어 성장한 여성운동은 이에 불을 지폈다.
일본 사회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갔다는 의미의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아직도 쓰고 있으면서도, 일제 말 한국사회에서 정신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성들을 위협했는지 그 사회사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1930년대 말 정신대는 무상으로 인력을 공출한 시스템의 대명사와 같았다. 의사들은 의료정신대로, 노동자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는데, 전쟁터의 군대로 끌려간 여성들은 군위안부가 된 것이다.
1990년대 초 여성운동은 긴 침묵 속에 입을 닫고 있던 이들을 사회로 불러냈다. 일본국가와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가 당신들을 군위안부로 만들었다고 알려주었을 때, 피해자의 마음에 맺혔던 멍울은 조금이나마 풀렸다. 창피한 역사를 드러낸다고 못내 싫어했던 우리 사회도 20년이 지난 오늘, 많이 성숙했다. 치욕의 역사는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해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수요시위는 무려 600회를 넘겼는데, 지금도 새로운 시민들이 참여하며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시민단체는 국제사회에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알려왔고, 현재도 무력갈등 지역에서 빈발하는 여성 폭력을 없애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아쉬움 또한 적지 않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나는데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유엔과 미국, 유럽연합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 국회에서 일본 정부에 사죄나 배상을 권고하는 결의가 통과되었지만 그것을 실행시킬 국제사회의 강력한 집행력이 없는 것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낀다.
이제 우리 시민단체는 역사적 진실과 활동의 과정을 학습 자료로 만들기 위해 박물관을 건립하는 단계에 있다. 한일관계에서, 또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일본군위안부문제는 긴 발효의 기간을 가질 거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는 진보하며, 인권은 그 무엇보다 값지다는 것을, 한국 근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보여주기를 염원한다.
정진성ㆍ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인터뷰/ 위안부역사관 설립한 쑤즈량 교수
"중국인은 위안부의 존재를 잘 모릅니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지 18년, 아직도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후배가 없네요."
쑤즈량(蘇智良ㆍ54) 상하이사범대 역사학과 교수는 5년 전 상하이 소재 위안소 149곳을 밝혀낸 을 써서 주목받았다. 같은 해 그는 교내에 중국 최초의 위안부역사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중국 정부는 부정적이었다"며 "끈질긴 연구 덕에 다이이치살롱 등 일부 위안소를 일제 침략의 증거물로 영구 보존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현재 위안부 문제를 공부하는 연구생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접한 것은 일본 도쿄대 연구원생 시절. 상하이 근대사를 전공했지만 생소한 내용이었다. "1992년 일본의 국제회의에서 '첫번째 위안소가 상하이에 있다'고 들었어요. 이듬해부터 현장을 부지런히 찾아 다녔죠."
쑤즈량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로 세운 위안부역사관은 아담했다. 관련 서적이 주를 이뤘고, 위안부가 사용했던 삿쿠(콘돔)와 머리빗, 신발 등의 유물이 몇 점 있는 정도였다. 그는 "사료가 생기는 대로 보충하고 있다"며 "중국 피해자 40여명이 살아있는 지금, 생존자의 증거 확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반면 상하이의 위안소들이 개발로 사라지는 데 대해서는 "그 많은 위안소를 다 보존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인 건물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교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쑤즈량 교수의 입장은 한국과 동일하다. 그는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주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 대응이 부럽다"고 했다. 그는 위안부역사관 차원의 모금과 사비로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이렇게 비참하고 무차별적인 범죄는 역사상 없었어요. 앞으로 중국이 남한, 북한과 손잡고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바랍니다."
상하이= 김혜경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