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전시장, 종이와 나무로 만든 모형 건축물들이 설치돼있는 가운데 뒷쪽 스크린에 흑백 CCTV 영상이 빠르게 흘러간다. 몸을 숙여 모형 도시들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면 스크린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게 된다.
조각 전문 미술관인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선정하는 2010년 '오늘의 작가'로 개인전 '일루전(환영)'을 열고 있는 설치작가 정정주(40)씨의 작품 '응시의 도시'다. 모형 건축물들은 상하이, 나고야, 일산 등지의 실제 건물들을 축소한 것이다. 하지만 뼈대만 남은 채 텅 비어있는 건축물들은 마치 가상의 도시 풍경처럼 공허하고 낯설다. 유일하게 환한 조명을 밝힌 모형 건물의 내부에는 카메라가 설치됐고, 이 카메라는 360도로 회전하며 어두운 도시의 내부를 속속들이 스크린에 비춘다. 관람객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겹쳐지는 가운데 감시와 통제, 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이 읽힌다.
'응시의 도시'는 광주 출신인 정씨의 기억 속에 박힌 도시 모습에서 출발했다. 그는 "어린 시절 총소리가 나면 숨곤하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고 말했다. "10대 시절 내내 제가 바라본 도시는 마비된 상태였어요. 늘 바깥이 무서웠습니다. 이 작업은 사회적 맥락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정서적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정씨는 도시의 실제 건축물들을 미니어처로 만듦으로써 우리가 몸으로 경험하던 공간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을 제공한다. 가로 4m, 세로 1.7m 크기의 설치작 '빌라(수색로)'는 수색로의 군인아파트를 함석판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모형 아파트 내부의 방에 24개의 모니터를 설치, 각 방의 모니터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말 소리가 건물 표면에 비쳐 어른거린다. 모니터에서는 24명의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개인적 상처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내내 입술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신문지를 잘게 찢으면서 내면의 불안을 드러낸다. 금속 재질 건물이 주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 그리고 그 속의 모니터에 담긴 사람들의 불안정한 심리와 이미지가 대조를 이룬다.
종이와 나무, 도자, 금속, 미디어,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망라해 정씨의 작품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빛과 공간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독일 유학 시절 기숙사 방으로 들어오는 빛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이동하는 것을 보고 공간과 빛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이후 기숙사, 매점, 체육관 등 주위의 공간들을 미니어처로 만들고 그 속에 빛을 들여 공간 자체를 새롭게 조명했다.
전시장은 온통 가로 세로의 격자무늬로 가득하다. 가장 최근 작업인 '형이상학적 별'은 직선, 곡선, 그리고 꺾인 형태의 격자무늬 알루미늄 건물 3개가 서로 엉켜 별 모양으로 빛나고 있는 작품이다. 정씨는 "논리적이고 단단한 구조에다 빛과 시선처럼 유동적인 것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관심사"라며 "앞으로는 가상의 공간 속을 관람객들이 드나들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통로 형태의 작업을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7월 29일까지. (02)3217-6484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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