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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맛을 만드는 사람들] (10) 커피 장인 허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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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맛을 만드는 사람들] (10) 커피 장인 허형만

입력
2010.06.2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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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만들면 식은 커피도 맛있다, 행복을 볶는 남자

'도시생활'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커피. 커피는 이미 현대인들의 필수 기호식품이 된 지 오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한 잔, 사무실에 도착해서 다시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오후에 늘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한 잔. 직장인들 대부분은 이렇게 자주 커피를 접한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거나 릴레이 회의로 이어진다면 또 한두 잔이 추가될 수도 있다고 하니 우리가 물 다음으로 이렇게 일상 중 많이 마셨던 음료가 일찍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외국계 커피 숍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커피를 마시는 방법에 다양한 종류가 있음이 알려지고, 대중화된 브랜드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은 점점 원두의 산지와 품질, 더 나아가 그 원두가 공정거래 된 제품인지까지 따져 마시는 시대가 되었다.

커피와 함께해온 32년

"내 고향 경남 고성에 가면 아직도 커피숍에서 '물커피'를 팝니다. 커피를 한 번 만들어 종일 데우니까 진해지고, 그 진해진 커피를 물과 희석시켜 마시는 거죠. 고향 친구들이 커피 맛 어떠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커피만 28년, 아니 식품공학을 공부했던 이력까지 치면 32년째 들어선 커피 장인은 이렇게 고향의 찻집에서 내오는 커피 맛을 이야기 한다.

서울 압구정역 근처에 위치한 허형만 선생의 '압구정 커피집'은 여덟 평 남짓한 아담한 공간이지만, 매주 수요일이면 이 공간이 조석으로 꽉 차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선생의 소문난 커피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들기 때문이다.

수요일 오전 강의는 아침 10시에 시작하는데, 장소의 특성상 좋은 자리에 앉고 싶다면 9시10분에 도착해서 나머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9년 전 같은 자리에서 첫 수업을 열었을 때만해도 첫 주와 그 다음 주의 수강생이 달랑 한 명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선생은 수요일 아침마다 사오 십명씩 들어차는 지금의 강의 시간을 뿌듯해 한다.

허 선생의 커피 강의는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두 시간을 조금 넘기는 분량의 강의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술술 귀에 들어온다. 강의 중간에 갓 내린 커피가 학생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려진다. 각자의 잔에 각자가 원하는 만큼씩 따라 마시면서 강의를 들으면 된다. 허 선생의 커피 강의는 세계사 수업을 방불케 할 만큼 역사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역사를 따라 흐르는 정치, 경제, 문화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커피는 물리, 화학, 수학, 생물 등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과 음악, 미술, 문학 등에 관한 소양과 감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얽혀 만났을 때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학구적인' 커피 선생님은 이처럼 강조한다. 빳빳하게 다린 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맨 허 선생은 강의 중간마다 커피를 내리고 마시는 상황을 사자성어로 표현하거나 본인이 영문 표현으로 조합하는 등 한자와 영어를 적절히 사용해 가며 좌중을 압도한다.

커피 원두의 종류, 신선도를 아는 법, 볶는 법과 가는 법 그리고 물의 온도와 물과 만나게 하는 법 등을 알면 '커피 박사'가 되겠거니 했던 나태한 내 짐작은 선생의 수업을 듣는 두어 시간 남짓 만에 무너졌다.

좋은 커피 맛의 기본은 철저한 자기 관리

허형만 선생의 커피 공간은 한 번 찾게 되면 꼭 다시 들르게 되는 중독성이 있다. 그 아담한 공간에서 강의를 들은 학생들만 해도 나까지 4,270명(2010년 6월16일 오전 기준). 커피 원두를 정기적으로 사다 먹는 사람들은 제외한 숫자다. 원두를 사러 오는 사람들은 먼 길을 마다 않는다. 한 번 올 때마다 100그램씩, 혹은 몇 킬로그램씩 사가는 원두 맛의 비결은 아무래도 매일 아침 커피를 볶는 허 선생의 정성에 있지 않을까.

"매일 아침 4시에 출근합니다. 그러니까 새벽 3시 좀 넘어서 아침밥을 먹고 양치를 철저히 하고 바로 출근을 하는 것이지요."

출근 후 커피를 직접 볶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동이 트고 오전 7시 경이 되면 커피 공간은 커피를 볶은 열기로 가득하게 된다. 두어 시간의 작업 후, 선생은 그날 볶은 커피를 한 잔 내리고 본격적으로 학생들이나 손님들을 맞기에 앞서 잠깐의 혼자 시간을 갖는다.

이런 생활 패턴을 유지하게 위해 건강관리는 필수과목이 되어 버린 허 선생은 이미 5년 전에 술을 끊었다 한다. 담배는 원래 피우지 않았고, 주말에는 반드시 산에 간다고.

"빨간 날은 쉬어요. 특히 주말에는 산에 가지요. 한 시간쯤 쉬지 않고 올라 집에서 준비 해 온 커피를 벗 삼아 간식을 잠깐 먹고 다시 사오 십분 걸려 내려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산에 가는 길에는 어떤 커피를 마실까.

"집에서 커피를 미리 내려 갑니다. 맛있는 커피는 식어도 맛이 좋거든요."

아, 선생이 맛있게 볶아 맛있게 내려서 배낭에 담은 식은 커피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는 무엇과도 두루 어울리지만 특히 샌드위치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치아바타나 호밀빵 혹은 겉이 바삭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즐긴다는 그는 베이컨, 치즈, 사과, 양파, 양상추 등을 적절히 조율해서 만든 샌드위치 한 입을 우물거리던 입에 커피를 한 모금 물면 행복이 "촤락" 퍼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맑고 향기로운 커피 맛은 그의 말에 따르면 '행복 전도사'가 될 수 있다. 좋은 커피 향기를 맡고 기분이 좋아진 이들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커피를 마신 후의 '깨어있는' 맑은 정신이 주변으로 퍼져나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맑고 향기로운 커피를 만들기 위해 제 관리부터 바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숨쉬기 운동과 늘 새 마음을 갖는 운동이 그 일환이고요."

숨의 들고 낢이 잘 되면 사람의 순환이 좋고, 순환이 좋은 사람이 청량하게 내린 커피는 마시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명쾌한 말씀이 커피 한 잔에 스며 내 입술을 지나 목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넘어간다.

군 생활은 본인의 타고난 체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고,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학과장님 추천으로 커피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에는 커피 추출과 볶기, 보관과 온도 등에 관한 무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무엇을 하든 언젠가 꼭 그것이 쓰일 날이 있다는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커피 장인의 향기가 대한민국 전체에 퍼져 '한국식 커피 향'이라는 고유의 표현이 생기게 될 그날을 기대해 본다.

●허형만식 아이스 카페라테 비법은

낮 시간 허형만 커피 집에 들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바로 손으로 생두를 고르는 장면이다. 흠집 난 생두를 골라내는 일을 손으로 일일이 작업을 한다. 스태프 한두 분이 앉아 커피 원두를 고르고 허형만 선생은 직원들을 위해 커피를 직접 내리기도 한다. 여름에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아이스 카페라테를 테이크 아웃 해 가기 위해 기다리는데, 인터넷 상에서 마니아들 사이에는 '명품 라테'로 통할만큼 인기가 높다.

"에스프레소를 조금 진하다 싶게 추출하면서 바로 얼음으로 냉각을 하고, 여기에 우유를 부어주면 됩니다"라고 비법 아닌 비법을 밝히는 커피 선생님. 하지만 직접 손으로 선별하는 질 좋은 원두에 아침마다 볶아내는 신선함, 그리고 추출해 내는 28년의 노하우는 하루아침에 따라잡을 수 없는 맛일 터. 일단 이 여름에는 지나는 길마다 허 선생의 커피 집에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기웃거릴 밖에. 신선한 재료로 갓 만든 샌드위치에 허형만식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이 또 다른 여름 별미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atgamsa@gmail.com

사진=임우석 imwoo5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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