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명상 그리고 노동… "생명 하나하나 빛이 나는 생태마을 꿈꾼다"
차 한 대 겨우 다닐만한 꾸불꾸불한 흙 길을 지나자 완만한 산 기슭에 컨테이너 4개가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산중에 있는 이 철제 시설물 앞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황대권(55)씨와 전진택(48) 목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집을 떠나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이 농장 일을 하다가 잠시 시간을 낸 것이다. 오늘은 김경일 성공회 광주교회 신부까지 찾아왔다. 세 사람의 관심은 이 산골에 제대로 된 생태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마을 이름은 이미 정해졌다. 생명평화마을. 전남 영광군 대마면 태청산(높이 593m)의 기슭에 대체 어떤 마을을 만들기에 이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일까.
전남 영광군 태청산 기슭 컨테이너·척박한 밭·농장… 작은 마을이 들어선다
황대권씨·전진택 목사 등 함께 일하며 배우는 대안학교 돌담·생태가옥도 곧 만든다
올 30여가구 입주민 모집 예정인 경쟁 대신 평화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마을
아직은 시작 단계인 생명평화마을을 이해하자면 생명평화결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생명평화결사는 모든 생명체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2004년 발족한 모임이다. 생명의 평화를 가꾸고 한반도, 나아가 세계 평화의 실현을 기원하겠다는 것인데 실상사 도법 스님 등의 생명순례탁발과, 생명평화학교 개설 및 생명평화대회 개최 등이 주요 활동이다. 생명평화결사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황씨는 "생명과 평화라는 이 시대 최대의 가치를 특정 장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면 생태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평화마을"이라고 설명했다. 생명평화결사는 네트워크 운동이기 때문에 이 이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라면 영광 이외 지역에서도 얼마든 같은 성격의 마을을 만들 수 있다.
생명평화결사는 마을을 만드는데 참고하기 위해 여러 공동체 마을을 둘러보았다. 각각 나름의 장점과 특징을 갖고 있었지만 그대로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태마을을 지향하되 대안학교도 갖고 있으면서 기존 마을 및 그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는 그런 마을을 만들고 싶었다. 하필이면 태청산 기슭에 터를 잡은 것은 마침 황 위원장의 선친이 그곳에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만들기는 2009년 시작했으나 아직 걸음마 단계다. 현재 확보한 면적이 16만5,000㎡ 정도 되지만 컨테이너, 황토집, 밭, 우물, 연못, 타조가 사는 작은 우리 등이 있을 뿐 나머지는 여느 산 자락과 같아서 나무와 돌이 많다.
계획대로라면 이곳에는 마을, 농장, 학교 등이 들어서는데 지금 그나마 조성된 것이 농장이다. 농장이라고 해봐야 3,300㎡ 정도의 밭이 있을 뿐이지만 그 밭에서 감자, 고추, 콩 등 먹을 것을 기른다. 작년에는 배추를 재배, 김장을 담가 맛있게 먹었다. 한쪽에는 제법 굵은 돌들이 쌓여있는데 다 밭을 일굴 때 나온 것이다. 돌이 많은 것으로 보아 토질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 목사는 "오래 전 밭으로 사용했지만 한동안 방치해 이렇게 척박해졌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농사를 제대로 배우고 토질을 좋게 하려면 아마 5, 6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논 농사도 짓는데 규모는 크지 않다. 농사와 관련해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채취농업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지역에는 고사리, 두릅, 취나물 등이 많은데 이들은 다년생초본을 더 많이 심어 채취농업을 활성화하겠다고 말했다.
전체 면적이 뻔하다 보니 마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올해부터 입주민을 모집할 예정인데 20~30가구 정도를 적정 인원으로 보고 있다. 마을 외부에 살면서 이곳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활동을 같이할 수도 있다.
학교도 만들 계획이다. 생태적인 삶, 자연농업 등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일하면서 배운다(learning by doing)'는 것을 원칙으로 삼겠다고 한다. 이론 그 자체보다는 생활을 더 중시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 집을 짓고 요리를 하고 옷감도 만들 수 있는 자급자족의 능력을 키워주려고 한다.
마을은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키로 이미 결정했다. 법인의 이사장은 장회익 전 서울대 교수가 맡았으며 도법 스님, 이병철 전 전국귀농운동본부 본부장, 김경일 신부 등 15명은 이사로 참가했다. 한국과 그리스의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린 12일에는 지역 주민, 생명평화결사 회원 등 120여명이 모인 가운데 법인 창립행사를 가졌다.
마을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곳에서는 현재 6명이 지내고 있다. 4명은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며 2명은 출퇴근한다. 서울이 고향인 황 위원장은 주소까지 옮겼으며 전 목사는 가족을 전북 진안에 둔 채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컨테이너 등에는 이들의 일과를 적은 종이가 붙어 있는데 척박한 땅을 일구자면 많은 시간 일을 해야겠지만 하루 노동 시간은 6시간으로 제한했다. 그 이상이면 일에 치이기 십상이다. 대신 명瓚?시간, 대화의 시간, 학습 시간을 갖고 자기 계발을 한다. 매월 넷째 금~일요일에는 생명평화결사 회원들이 찾아와 일을 도와준다.
6명이라는 인원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고 갈등이 있을 수 있으니 생활 규칙을 정했다. 폭력을 써서는 안되고 매일 자기 성찰과 명상을 해야 하며 당사자 앞이나 공론장 외의 장소에서는 타인을 비방할 수 없고 매일 일정한 시간 공동체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이고 단순한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다소의 긴장을 주는 것은 바로 가축들이다. 다른 농장 혹은 지인들이 키워달라며 맡긴 것인데 가끔 일을 일으킨다. 그 가운데서도 지난 겨울 유난히 추웠던 날 우리의 문이 열린 틈을 타 밖으로 달아난 타조가 가장 걱정이다. 며칠 동안 찾아 다녔으나 행방이 묘연하다. 황 위원장은 "어딘가에서 잘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남아 있는 타조 두 마리는 몸이 불었는데 전 목사가 타조 먹이를 정성껏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컨테이너 숙소 바로 앞을 지키는 흰둥이 개는 최근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아 기쁨을 주었다. 얼마 전에는 밖에 놓아 기르던 토종 닭이 한 마리만 남고 사라져 버린 일이 일어났다. 족제비 등 산짐승들이 의심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이 닭을 해쳤다는 증거는 없다. 닭을 잃고 마음이 허탈해져 있을 때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암탉 한 마리가 병아리 세 마리를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전 목사는 "앞으로는 동물을 기르려면 회의를 열어서 결정해야겠다"며 "먹이 만들기도 어렵고 자리도 비울 수 없어 녀석들을 돌보는데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최근 완성한 16㎡ 규모의 황토집은 이들의 은근한 자랑이다. 100% 아마추어인 이들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해가며 4개월에 걸쳐 지은 것인데, 구들을 놓고 들보를 설치할 때를 빼고는 모두 자신들의 힘으로 했다며 흐뭇해한다. 황토 역시 산 기슭에서 떠왔는데 그 때문에 시공비가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 때에 비해 4분의 1밖에 들지 않았다. 이들은 황토집을 비롯해 압축 볏짚을 이용한 스트로베일하우스 등 생태가옥과, 돌이 많은 지역 특징을 활용해 돌담 등을 조성할 생각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외형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적 가치를 생활 속에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다. 수행과 자기성찰 그리고 노동을 통해 평화롭게 살기로 하고 만드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해도 사람이 모여 사는 한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그마저도 슬기롭게 극복할 공동체를 이들은 꿈꾸고 있다.
황 위원장은 "10년 후 다시 한번 와보시라"고 말했다. 그때는 지배와 정복, 경쟁과 파괴에서 해방돼 모두 조화롭게 공생하는 세상이 이 작은 마을에 들어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야생초 편지' 쓴 황대권씨, 출감후 생태운동가 활동
황대권씨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돼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출감할 때까지 13년 2개월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감옥에 있을 때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생태적, 영성적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자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연과 친화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농업이었다. 감옥에서도 작은 텃밭을 가꾸며 여러 작물을 재배했으며 그때의 경험을 모아 2002년 최고의 베스트 셀러 를 출간했다. 앞서 2000년 국제앰네스티의 초청으로 유럽에서 인권과 관련한 강연과 증언을 하는 한편 영국의 임페리얼칼리지에서 생태농업을 공부했다. 2001년 말 귀국해 생태운동의 이념과 필요성 등을 강연하다가 도법 스님을 만나고 생명평화결사에 뛰어들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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