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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6·25 60돌… 허찬형씨의 슬픈 회고록 "그때 빨갱이 낙인이 60년 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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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6·25 60돌… 허찬형씨의 슬픈 회고록 "그때 빨갱이 낙인이 60년 갈 줄이야"

입력
2010.06.2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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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도 정치인도 아닌데,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죄인 취급(을 당한 것)이 한으로 남아…."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전후 60년 삶을 "더부살이"라고 불렀다.어엿한 가정을 일구고 애써 터를 잡았지만 여전히 그는 외부인이었다.

6ㆍ25전쟁 60주년을 맞아 참상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에게 전쟁에 대해 묻거나, 찾는 이는 없다. 당시 그의 총부리가 남쪽을 향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인민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우리의 이웃이다. 대전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평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한국전쟁 60주년은 어떤 의미일까. 인민군 공병대 소대장으로 6ㆍ25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돼 남한에 남은 허찬형(81)씨를 만났다. 그의 가슴 속 응어리를 통해 우리 안에 남은 전쟁의 상처를 살펴봤다.

헤어날 수 없었던 현대사의 질곡

허씨는 1929년 평북 삭주군 외남면에서 태어났다. 소작농 10남매의 막내였고, 가난에 공부라곤 일곱 살부터 4년간 글방에 다닌 게 전부였다. 12세에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14세(1943년) 때는 일본 근로보국대에 끌려가 철광석을 캐는 광산에서 노동을 했다. 징집대상이 아닌 어린 나이였지만 뇌물을 받아먹은 면 직원이 원래의 대상자를 빼고 엉뚱하게 허씨의 이름을 올리는 바람에 끌려갔다.

"콩깨묵밥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기름 짜내고 남은 콩 찌꺼기 뭉쳐서 일본 놈들 군에서 말 먹이는 사료야. 노천철광에서 열 몇 시간도 넘게 곡괭이질 하고 나면 콩깨묵밥 한 덩이를 밥이라고 줘, 그때 우린 사람이 아닌 말이었어."

꼬박 석 달 만에 허씨는 손이 헐고 배가 곯아 병원에 가도록 허락된 날 달아나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삐쩍 곯아서 도망도 못 갈 놈이라고 병원엘 보내줬거든. 다섯 시간을 숨도 안 쉬고 내리 달리면서 해방되면 꼭 공부를 해서 힘을 키워야겠다 했어."

광복 후 남과 북이 갈린 상황에서 인민군에 자원 입대한 것도 공부시키고 밥도 준다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6ㆍ25를 맞았다. 그 해 8월 낙동강 전선에서 발목 관통상과 한쪽 청각 상실 등의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던 중 인민군이 밀리자 낙오돼 산에서 숨어 지냈다. 허씨는 1952년 붙잡혀 광주포로수용소에서 빨치산 활동 혐의로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13년을 살았다. 공부를 해서 힘을 키우겠다는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낙인

65년 5월 어느 날 출소했지만 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해가 쨍쨍하던 날인데, 반바지에 다 떨어진 고무신짝 신고 형무소 문을 나서는 길이 말도 못 하게 춥고 막막했어요, 정말 추웠어."

그는 이후 남의 가게 담장 밑에서 리어카를 얻어다 빵 장사, 음료수 장사 등으로 연명했다. 67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판잣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밤새 물건을 팔아 월세를 마련했지만 돈보다 더한 고통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1년에 서너 번은 방을 옮겼고, 한 달이 채 안돼 쫓겨나듯 이사를 가던 겨울도 있었다. 당시 아들과 딸은 세 살, 한 살이었다. 이웃들이 허씨 가족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사들이 자주 와서 불안하다, 빨갱이에게는 세를 줄 수 없다, 범죄자니 같이 살기 불안하다 등등 이유야 수두룩했어. 반공교육이 워낙 심할 때라서."

"다 이해한다"고 허허 웃는 그의 얼굴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어쩌면 평생 인민군 죄인 놈 소릴 듣고 산 셈이지." 그나마 지금은 사정을 이해해주는 이웃들도 있다. 허씨 집에 마실 온 이웃들은 허씨를 거들 듯 "아이고, 맞아 맞아, 형사들이 참 많이도 찾아왔지. 우리한테도 이것저것 캐묻더라니까"라고 했다.

그는 사실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이 이뤄졌던 2000년에 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못 배우고 배고파 군에 갔던 건데, 어느새 범죄자로 이 사회에 살고 있더라고. 날 때 가진 것 없이 핏덩이로 태어났는데, 저 세상 갈 때 죄인 꼬리표를 달고 가서야 되겠냐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죽기 전에 고향 땅 밟고 싶어서…." 그러나 만류하는 가족의 뜻을 받아들여 그냥 남한에 남았다.

그는 여전히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남과 북이 안타깝다고 했다. 최근 경색되는 남북관계도 걱정이다.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한참 말을 이어갔다. "전쟁만큼 끔찍한 게 없어요. 서로 갈등하려 하지 말고 터놓고 대화하고 풀어갔으면 좋겠어요. 친일파 청산 등 정말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은데…."

김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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