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르강을 경계로 동쪽엔 '전통' 서쪽엔 '모더니티' 절묘한 조화
오스트리아 남동쪽 슈타이어마르크주의 주도 그라츠시.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구 25만명의 중세 도시로 반경 50km 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남쪽으로는 슬로베니아와 인접한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종종 지정학적 위치에 빗대 그라츠의 성격을 설명한다. 엄격함이라는 독일 문화권의 특징과, 개방성이라는 발칸 문화권의 특징을 모두 지닌 도시라는 것이다.
이같은 양면성은 그라츠를 이해하는 코드다. 예컨대 도시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무르강을 경계로 강 양안의 공간구조가 상이하고 사회ㆍ경제적인 불균형 현상이 빚어진 것은 그라츠가 지닌 양면성의 부정적 측면이다. 반면 전통과 모더니티, 혹은 개발과 보존처럼 함께하기 힘든 양면적 가치들이 공존하는 것은 이 도시의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전통의 보존, 무르강 동쪽 구도심 역사지구
무르강 동쪽의 그라츠 구도심은 전형적인 중세 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해발 473m의 슐로스베르크 언덕을 중심으로 구릉을 따라 상점가가 줄지어 있고 평지로 내려오면 시청, 성당,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시가 전개된다. 구도심은 마치 서양건축사 박물관 같다. 르네상스 양식의 엄격한 형식미가 인상적인 예수회수도원, 바로크 양식의 지붕과 외벽의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가 잘 어울리는 상가 건물, 탈르네상스 건축양식인 매너리즘 양식의 페르디난드 2세 유해안치소 등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V자를 거꾸로 한 모양으로 꺾인 붉은 지붕들이 올망졸망 잇대어 있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도 근사하다.
그라츠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도시의 역사성을 공인받았다. 그러나 거기 이르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라츠에서 구도심 보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초. 당시 시장이던 구스타브 쉐르바움이 '친 자동차 정책'을 내세워 구도심의 중심 도로이자 보행자도로였던 헤렌 거리를 왕복 4차선의 자동차도로로 만들고, 시 외곽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이 불씨가 됐다. 언론과 시민들은 '그라츠 구도심 보존운동'으로 맞섰고 논쟁은 가열됐다. 쉐르바움은 1973년 시장선거에서 낙선했고 점차 보행자 우선 정책, 역사유산 보존 정책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힘을 받았다. 이후 시 당국은 주차장으로 쓰이던 카르메리터 광장을, 주차장은 지하로 옮기고 조경수와 분수를 설치해 시민휴식공간으로 바꾸었다. 헤렌 거리에는 자동차 진출입을 전면 금지시켰다.
관광객들에게 그라츠시를 소개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가브리엘레 판츠너는 이런 역사유적 보존 정책이 도시의 가치를 높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라츠의 다른 산업은 성장이 지지부진하지만 관광산업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며 "가까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온 관광객들뿐 아니라 요즘은 일본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라츠시의 구도심 보존 정책은 상당히 강력하다. 건물 증개축 때 주위의 역사적 건물보다 층고를 높이 올리면 안되고, 증개축을 위해서는 슈타이어마르크주, 그라츠시 등 4개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부 건축전문가들은 "창문 하나만 새로 내려 해도 까다로운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런 정책은 도시의 활기를 잃게 만든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시의 입장은 확고하다. 베르트람 베를레 그라츠시 건설개발국장은 "구도심 개발정책의 핵심은 도시의 '퀄리티' 유지"라며 "오래된 건물들 사이의 조화를 깨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퀄리티"라고 말했다.
실험과 조화의 공간, 무르강 서쪽
무르강 서쪽은 동쪽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오래된 건축물도 있지만 동쪽 역사지구의 것들처럼 가치가 있는 건물은 많지 않다. 동쪽 지구가 중세부터 귀족, 부르주아 계급의 거주지역이었고 지금도 중산층, 상류층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면, 서쪽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산다. 여전히 홍등가의 흔적도 남아있고 건물 임대료도 동쪽 지구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 강남북만큼은 아니지만 그라츠시는 무르강 양안의 문화적 이질감과 사회ㆍ경제적 격차 해소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강 서쪽 지역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방치돼 있던 무르강 서쪽 공터에 2003년 위용을 드러낸 전시ㆍ공연장 쿤스트하우스는 그라츠시가 이 문제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포스트모던한 건물양식 때문에 초기에는 전통을 파괴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라츠 시민들은 요즘 쿤스트하우스를 '친근한 외계인'이라 부를 정도로 이 건물은 도시의 명소가 됐다.
쿤스트하우스 일대에는 고급 레스토랑, 영화관, 바 등이 속속 들어섰고 무르강 서쪽 지역은 도시 발전의 새로운 축으로 떠올랐다. 로거 리베 그라츠공대 건축학과 교수는 "만일 빈이나 잘츠부르크처럼 전통의 무게가 강한 도시였다면 이같은 시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그라츠에서는 보수적인 생각과 전위적인 생각이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도시 정체성 확립이 곧 갈등 해소책"
유럽연합이 그라츠를 '유럽 문화수도'로 지정한 2003년에는 또 무르강 물결 위에 조개 모양의 인공섬 '무린젤'이 떴다. 이곳은 '조화와 통합'이라는 그라츠시의 이상을 웅변한다. 강 양안에 연결된 철제 다리가 섬을 고정하고 있는데 다리의 길이는 양안까지 각각 30m로 똑같다. 도시 양안의 균형발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라츠시는 최근 서쪽 지역에서 '라이닝하우스 프로젝트'라는 도시개발계획에도 착수했다. 1980년대 중반 문을 닫은 채 방치돼있던 50만㎡ 규모의 맥주공장 부지를 사들여 대표적인 도시재생의 모델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다. 20년 이상에 걸쳐 전통의 구도심과는 차별되는 현대적 시가지를 꾸미겠다는 장기 프로젝트로 1억1,000만유로(약 1,6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그라츠 시의회의 게르하르트 뤼쉬 의원은 "도시의 동쪽은 동쪽대로, 서쪽은 서쪽대로 전통과 모더니티라는 각자의 정체성을 가꿔가도록 하겠다"며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갈등과 불균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도시기획가' 에베르하르트 슈렘프 CIS디렉터
"그라츠의 미래는 창조성을 어떻게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창조적인 도시계획, 창조산업에 대한 투자가 도시를 살릴 것입니다."
그라츠시 CIS(Creative Industries Styria) 디렉터 에베르하르트 슈렘프(51ㆍ사진) 는 그라츠시의 미래 비전을 구체화하는 도시기획가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2003년 유럽연합 유럽문화수도 지정으로 도시의 가치를 공인받은 그라츠의 현안은 유네스코의 '디자인 도시' 지정이다. CIS는 이를 위해 2007년 슈타이어마르크주와 그라츠시가 만든 조직이다. 이 조직의 주된 일은 시민들과 기업에 '창조성'의 가치를 홍보하고 교육하는 것.
슈렘프는 "창조성의 원동력은 그라츠 인구 5분의 1에 해당하는 4만여명의 학생"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유럽의 독일어권 도시 150여개 중 학생의 수가 인구 비율로 이 정도 되는 도시는 드물다. 그는 "동유럽과 접해 있어 다양한 문화가 뒤섞일뿐더러, 많은 유학생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도시의 유동성이 곧 창조성으로 승화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인구 25만명인 그라츠시에는 무려 6개의 대학이 있다. 이 대학들이 중점적으로 연구ㆍ강의하는 분야도 그라츠시의 산업기반과 관련이 있는 자동차ㆍ기계공학에서 점차 건축, 미디어, 디자인, 영화, 게임 등 이른바 '창조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창조성을 발휘해 성공한 도시인 이탈리아의 토리노를 닮고 싶다"고 슈렘프는 말했다. 토리노는 자동차산업의 몰락으로 입은 타격을 디자인산업을 통해 회복했고,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철도 지하화, 공원 조성, 폐공장 부지의 예술공간화 등으로 그라츠시의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라츠의 대표적 예술축제인 '슈타이어마르크의 가을' 예술감독, 유럽연합 유럽문화수도 지정추진위 준비기구 총책임자 등을 역임한 그는 그라츠시의 야심찬 도시재생 계획인 '라이닝하우스 프로젝트'도 창조성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과 삶과 놀이가 일치하는 도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창조적 두뇌가 모여 있는 만큼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국내 사례/ 인공섬 '플로팅 아일랜드'
요즘 월드컵 응원 열기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는 거리응원 장소가 반포 한강시민공원이다. 이곳을 찾는 시민들은 강물 위에 뜬 가로 25m 세로 13m의 대형 전광판에 비치는 유명 연예인들의 구호에 맞춰 단체응원을 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미디어아트갤러리'로 불리는 이 수상 전광판과 함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전광판 뒷편으로 떠다니는 3개의 수상 섬. 이 섬들이 올 연말 개장 예정인 한강 최초의 수상 문화공간 '플로팅 아일랜드'이다.
플로팅 아일랜드는 현재 공정 72%로 아직 내장 공사가 이뤄지지 않아 뼈대만 강물에 떠있는 상태다. 3개의 섬이 공식 개장하면 한꺼번에 7,000명의 사람들이 인공섬에서 식사를 하거나 공연을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요트를 탈 수 있다. 민자 964억원을 유치해 만들어진다. 서울시는 플로팅 아일랜드 조성 의의를 "지금까지의 강은 그냥 강변에서 경치로 바라보는 대상에 불과했지만 플로팅 아일랜드는 강 자체가 활용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발상의 전환을 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울시의 바람대로 플로팅 아일랜드는 한강의 새로운 볼거리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대규모의 인공 섬을 왜 조성했는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외국의 경우 화물용 컨테이너를 재활용해 강 위에 띄운 뒤 수영장으로 활용하거나, 강물을 자연적으로 정화해 용수로 쓰는 등 '생태친화'와 '에너지 자급' 등 글로벌 이슈를 반영해 인공 섬을 조성한다"며 "단순한 재미와 볼거리로 플로팅 아일랜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그라츠=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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