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29ㆍ스위스ㆍ랭킹2위)는 기자회견에서 자신보다 랭킹이 한참 떨어진 선수와의 경기 전망을 묻는 질문에 "행운은 필요 없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할 뿐이다"라며 상대를 깔보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페더러가 "행운이 나를 살렸다"며 한껏 몸을 낮추며 겸손해했다. 22일(한국시간) 영국 런던교외에서 열린 윔블던테니스 남자단식 1회전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난 직후 더 타임스 등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다. 페더러는 나아가 항상 겸손한 자세로 경기에 나서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디펜딩 챔피언 페더러가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인 윔블던에서 알레한드로 팔라(27ㆍ콜롬비아ㆍ60위)에게 먼저 두 세트를 내주는 고전 끝에 3-2(5-7, 4-6, 6-4, 7-6,6-0)로 역전승, 2회전에 올랐다. 페더러가 이날까지 875경기를 치르는 동안 세트스코어 0-2로 끌려간 경우는 6차례에 불과할 정도로 팔라와의 경기는 식은땀이 줄줄 흐른 한판이었다.
팔라는 사실 페더러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 수 아래 상대였다. 페더러는 팔라와 모두 4번 대결해 단 한 게임도 허용치 않고 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날 팔라는 달랐다. 왼손잡이 팔라는 1세트부터 반 박자 빠른 리턴 샷으로 페더러를 괴롭히며 1,2세트를 잇달아 따냈다. 페더러는 3세트를 어렵사리 건지며 한숨 돌리는 듯 했으나 자신의 서브로 시작된 4세트 첫 게임을 빼앗기면서 '디펜딩 챔피언 1회전 탈락'의 악몽을 꾸는 듯 했다.
그러나 프로통산 875경기를 맞이한 백전노장 페더러의 위기관리 능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페더러는 게임스코어 3-5까지 뒤졌으나 자신의 서브게임을 지켜 4-5를 만들었고 이어진 팔라의 서브게임에서도 벼랑 끝으로 몰렸으나 극적으로 브레이크하며 게임스코어 5-5로 만들고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이어 게임을 서로 주고 받은 뒤 타이브레이크에서 7-1로 압승을 거두고 세트스코어 2-2 균형을 맞췄다.
반면 대어를 거의 다잡았다가 놓친 팔라는 5세트에서 급격히 무너졌다. 기세가 오른 페더러는 전의(戰意)를 상실한 팔라에게 단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3시간18분의 혈투를 마무리했다. 페더러는 경기 후 "팔라는 나를 극한상황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는 공교롭게도 페더러 뿐만 아니라 상위 랭커들이 잇달아 풀세트 접전을 치러 눈길을 끌었다. 랭킹 3위 노박 조코비치(23ㆍ세르비아)와 5위 니콜라이 다비덴코(29ㆍ러시아)가 기사회생하며 2회전에 진출했던 것. 우승후보로 꼽히는 멤버 3명이 1회전에서 풀세트 접전끝에 진땀승을 거두고 2회전에 올라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조코비치는 올리비에 로퀴스(29ㆍ벨기에ㆍ68위)를 3-2(4-6 6-2 3-6 6-4 6-2)로 따돌렸고 다비덴코는 케빈 앤더슨(24ㆍ남아공ㆍ95위)을 상대로 4시간13분의 혈투 끝에 역시 3-2(3-6 6-7 7-6 7-5 9-7) 역전승을 거뒀다.
한편 여자부에선 올 시즌 프랑스오픈 단식 챔피언 프란체스카 스키아보네(30ㆍ이탈리아ㆍ7위)가 1회전에서 탈락하는 이변을 낳았다. 스키아보네는 베라 두셰비나(24ㆍ러시아ㆍ56위)에게 1-2(7-6 5-7 1-6)로 역전패,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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