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에 있는 사적 제 265호, 단양적성(丹陽赤城)에 오르다 보면 석축의 성벽(城壁) 가까이 비각이 하나 있다. 비각 속에 돌비(石碑)가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 비가 바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이다. 비의 일반적인 형태는 높이가 높고 폭이 좁은 데 비해 이 비는 높이가 낮고 폭이 넓은데다 윗부분은 일부 파손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특이하다. 화강암의 자연석에, 글자를 새긴 앞면만 약간 고르게 다듬고 글자를 새겼다.
이 비가 발견된 사연이 흥미롭다. 1970년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는 해마다 방학을 이용 사학과 학생들과 같이 충청도 지역의 문화재 현황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1978년 1월 6일, 대학박물관장인 정영호교수를 단장으로 하여 단양군을 대상으로 답사를 하게 되었다. 먼저 단양 읍내의 뒷산 해발 323m 성재산에 있는 산성에 올랐다. 산성은 전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었지만 강행군 하기로 하고 오후 2시경이 지나 산성에 올랐다. 양지바른 곳은, 내린 눈이 녹아 등산화 바닥에 흙이 달라붙어 걷기가 불편했다. 이 때 단장의 신발 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 위해 마침 땅에 묻혀있는 돌에 대고 흙을 털어 내고자 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신발을 돌부리에 올려놓으려는 순간 돌에 새긴 글자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적성비는 그렇게 1400여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눈앞에 그 자태를 드러냈다.
남아있는 비문의 판독으로 이 비가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 영역이던 단양을 점령한 뒤 마련한, 소위 국경개척을 기념하는 척경비(拓境碑)로 6세기 중엽에 마련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잠깐 비문의 내용을 보면 진흥왕이 이사부와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 등 10여 명의 대신들에게 명을 내려 국경 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이차(也尒次)와 가족들의 공을 표창하고 이들처럼 신라에 충성하면 포상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의 윗부분이 파손되어 부분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워 유감이지만 비문에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와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 등의 이름이 있어 진흥왕 당시의 인물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신라 진흥왕대에 새운 척경비는 창녕에 있는 것과 이 단양 것, 단 두 예가 알려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알려진 바 없다. 창녕의 척경비는 한 때 순수비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에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에 보존되고 있다.
비석을 새우기 위해 마련한 대석이 발견되지 않아 당초부터 마련하지 않은 것인지도 의문이다. 북한산비처럼 외진 곳에 비의 대석에 꽂힌 상태로 남아있었다면 당초의 모습을 알 수 있었겠지만 제 위치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땅에 묻혀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결국 정확한 제 위치는 지금도 미스터리라 할 수 밖에 없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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