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자대에 배치 받았을 때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던 일등병 고참이 내게 처음 한 말은 이랬다. "월드컵이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다. 도대체 뭘 하며 그때까지 견뎌야 하냐?" 고참들의 수발을 들면서도 우리는 86년 월드컵까지 견뎠고, 고참들이 줄줄이 제대한 막사에서 그와 나는 14 인치 TV의 실내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리며 86 년 월드컵을 보았다. 은하수 가득한 별 밤처럼 가물거리던, 질 낮은 화면 속에서도 마라도나의 드리블은 유성처럼 선명했다.
그 열광과 함께 해 온 20여년
1990년, 나는 어느 직장의 신입사원이었다. 새벽에 월드컵 중계를 보고 출근하던 버스 속에는 나처럼 눈이 벌건 직장인들이 많았다. 유럽과의 격차는 컸다. 조조의 백만 대군에 맞선 장판교의 장비처럼 혼자서 온몸으로 골문 앞을 지키던 홍명보라는 젊은 신인 선수가 있었다. 부장은 나보고 홍명보같이 회사를 온몸으로 지키는 선수가 되라 했다.
1994년, 나는 연출부의 막내로 이라는 영화의 촬영 현장에 있었다. 뒤늦게 들어간 영화 현장은 무척 더웠고, 방만한 생활로 약해진 몸은 현장의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과연 앞으로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지를 매일매일 고민할 때, 40 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서 최강팀 독일의 골문에 두 골이나 넣는 선수들을 보았다.
1998년, 멕시코와의 경기 중 하석주가 넣은 프리킥 골을 보고 내가 지른 함성에 다섯 살 된 아이가 놀라서 울었다. 몇 분 뒤 하석주를 퇴장시킨 주심을 향해 내가 뱉은 육두문자는 오랫동안 아이의 언어생활에 안 좋은 흔적으로 남았다.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참담했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축구는 없다'라는 다소 과격한 이론들이 난무했다.
2002년, 내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렸는데 나는 미국에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아무도 월드컵에 관심 없었다. 심야에 한국 경기를 보다가 하프 타임 때 담배를 피우러 아파트 마당에 나갔더니 아래층 미국노인도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가 쿵쿵거린다고 불평을 많이 해서 몇 번 말다툼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코리아, 굿"이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출신이라고 했다. 그 뒤부터는 아이가 쿵쿵거려도 별 말이 없었다.
2006년, 새내기 신임 교수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토고라는 생소한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영세 중립국 스위스의 사람들이 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착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축구 중계 때 박지성 선수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면 붙는 자막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감동적이었다. 프랑스 전 후 친구들과 우리 인생에 벼락같이 나타난 축복, 박지성 선수가 앞으로 몇 번의 월드컵을 우리와 함께 할 것인지 따져봤다. 적어도 두 번은 더, 우리의 운이 좋다면 세 번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앞으로 7번 이상 더 보겠지
그리고 다시 2010년의 디지털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끊임없이 관전평이 올라오고, 다음 경기의 선발 라인업을 놓고 치열한 격론이 벌어진다.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 이론이 타당하다면 다음 월드컵에서는 국가 대표 선발을 놓고 인터넷을 통한 국민투표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리스전 후 친구들과 앞으로 우리 인생에 몇 번의 월드컵이 남았는지를 따져 보았다. 7번, 8번, 최근에 담배를 끊은 친구는 호기롭게 10번을 외쳤다. 분명한 것은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뜨거운 열정만으로도 월드컵은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승리의 벅찬 감동 뿐만 아니라 좌절의 뼈 아픔도 월드컵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열정인 것이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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