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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가난 겪은 '금순이' 할머니 12명 잔칫상 받고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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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가난 겪은 '금순이' 할머니 12명 잔칫상 받고 눈물

입력
2010.06.2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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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난 이런 잔칫상 처음 받아보는데….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허허."

22일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 앞마당. 떡, 한과, 과일 등 풍성한 음식이 한 상 차려졌다. 6ㆍ25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은 할머니들은 상 앞에 선뜻 앉을 엄두를 못 낸 채 눈만 휘둥그래져 있는데, 잔칫상 곁으로 일단의 밴드까지 등장한다. 송파구실버악단의 이 날 레퍼토리는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연주가 시작되자 12명의 할머니들은 손뼉으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눈보오라가 휘나알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ㆍ4 이후 나홀로 왔다…"

6ㆍ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특별전 '굳세어라 금순아'를 연 국립민속박물관이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1ㆍ4후퇴 때 월남해 전쟁을 겪은 '금순'이란 이름의 할머니 12명을 초청해 위로잔치를 연 것. 전쟁 보릿고개 산업화 민주화 등 격동의 현대사를 겪어내며 대한민국의 오늘을 일궈낸 '굳센 금순이'들에 대한 사은의 이벤트였다. 할머니들은 "먹고 사느라 바빴는데 오늘 같은 날을 맞이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노래의 신명도 잠시. 할머니들은 광복과 전쟁 등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고생의 기억들을 한 마디씩 털어놓았다. 옅은 보라색 모시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송금순(72)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붙들려 가서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고초를 겪었어. 농사 지은 것 다 빼앗기고 논에 돌피(벼과의 한해살이 풀)를 갈아 죽을 쒀 먹었지"라고 운을 뗐고, 한금순(77)씨는 "중공군을 피해 1ㆍ4후퇴 때 함경남도 함흥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지낸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한씨는 당시 북쪽에서 농민들에게 현물세를 거두고, 쌀 700g씩 배급한 것도 또렷이 기억했다. 가정부, 사탕공장, 연탄배달, 채소장사로 3남1녀와 손자를 키운 주금순(70)씨는 돌 때부터 키운 손자 김민승(20)씨의 큰 절을 받고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이날 처음 만났지만 같은 이름, 같은 이북 출신, 피난 경험 등을 공유했다는동질감으로, 금세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처럼 친해져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홍금순(60) 할머니는 "아버지와 오빠랑 같이 내려 왔는데 오빠가 나를 업고 내려와 그렇게 고생을 했어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백금순(60)씨는 "나는 방공호에 숨어 있는데 폭탄이 터져 내가 울까 봐 아버지가 기저귀로 내 입을 틀어 막었다더라"며 맞장구를 쳤다.

장출혈로 입원했다가 지난 주 퇴원한 차금순(68)씨는 "금순이란 이름 하나로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느껴졌다. 고생한 만큼 이제는 모두 건강하게 살아야지…"라고 말했다.

2시간 여의 짧은 잔치가 끝나고 자리를 파한 뒤에도 할머니들은 이별이 아쉬워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행사를 주최한 신광섭(59) 박물관장은 "한 달 전에 공고를 내서 참가 신청을 받았는데 40명에게 연락이 왔으나 사정상 모두 참석하지 못하셨다"며 "전쟁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금순이 누님, 어머님, 할머님께 우리 모두 감사의 마음을 갖자는 취지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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