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과 이황은 같은 홍문관에 선후배로 근무하면서 1강9목소(一綱九目疏)를 올린 바도 있고, 서로 학문과 경륜을 인정하며, 관직에 천거해 주기도 한 좋은 사이였다.
그러나 입장은 차이가 있었다. 이황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림의 종장이었는데 비해 이준경은 영의정으로서 조정의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재상들의 구신집단과 신진사림들의 충돌을 중재해 보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선조의 신정 초기라 왕의 뜻이 신진 사림들에게 가 있을 때였다. 신진 사림들은 퇴계를 종주(宗主)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세도(世道)를 만회하고 부정한 것을 제거하며, 깨끗한 것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의 추종자로서 버림받아 쓰이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세태에 따라 부침(浮沈)하면서 오랫 동안 부귀와 안일에 젖어 있는 명망 있는 구신들도 있었다. 이들은 신진 사림을 소기묘(小己卯)라고 불렀다. 조광조(趙光祖 )의 기묘사림(己卯士林)들과 비슷한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이준경은 영의정으로서 한편으로 기묘사화를 거울삼아 신진 사림의 과격한 처사를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구신들이 뭉쳐 신진 사림을 일망타진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1568년(선조 1) 7월 이준경의 추천으로 이황이 우찬성에 임명되었을 때의 얘기다. 이황은 병을 이유로 관직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선조의 강권으로 서울 건천동(乾川洞) 집으로 올라왔다. 그랬더니 축하객이 몰려 3일 뒤에나 겨우 영의정 이준경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준경은 대노했다. "공이 서울에 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왜 빨리 찾아오지 않았는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늦었다고 하자, "옛날 기묘사화 때도 사습(士習)이 이와 같았다"며 준열하게 나무랐다. 세인의 이목이 이황에게 지나치게 쏠리면 기묘사화와 같은 사림의 화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황에게는 이름을 좋아한다느니, 병을 핑계댄다느니, 산새와 같이 달아나기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비난이 따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569년 6월 대사헌 김개(金鎧)가 사림을 탄핵했다. 이 말이 나오자 윤원형·이량의 무리들이 두 세력을 이간질시켜 사림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했다. 이 때 이준경은 이들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을사사화와 안처겸(安處謙) 난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해주고, 가해자들의 공신호를 삭제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자 김개는 관직을 내놓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림의 승리였다.
사림이 승리했으니 사림이 갈릴 차례이다. 기묘사림은 사림의 힘이 덜 성숙되었을 때 과격한 개혁을 주장하다가 실패했다. 이황은 이러한 실패를 거울삼아 안으로 서원(書院)·향약(鄕約)·유향소(留鄕所) 등을 통해 사림의 수와 힘을 늘리고, 밖으로 도학 이론을 깊이 연구해 사림의 시대를 감당할 만한 기반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17세기 이후 사림정치 시대를 열 수 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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