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국정을 어떻게 이끌지 큰 틀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6ㆍ2 지방선거에서 표출된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여서다. 정책 우선순위를 재점검하고 내각과 청와대 시스템과 진용을 개편하며 당정관계 틀을 다시 짜고 젊은 층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역사의 큰 흐름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선거에 졌다고 국정기조까지 뒤흔들 생각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야당 등 반대세력의 대꾸가 고울 리 없고, 오만 독선 안일 불통 무책임 등 날 선 표현을 퍼부었다. 당장의 정국 주도권과 곧 다가올 권력게임을 의식한 기싸움 성격의 공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따뜻한 국정'을 내세우는 청와대의 인식에 허술한 구석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대기업ㆍ관 위세에 영업환경 악화
이 대통령은 친서민 중도실용의 기치와 성과를 확인하며 "지금 대기업과 중소기업까지는 이미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고 지속적인 성장궤도에 올랐다"고 선언했다. 또 고용시장의 호전에 주목하며 "금년 하반기쯤이면 자영업자와 서민중산층도 경기회복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어디서 어떤 보고를 받았는지는 모르나 대다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서민층에게 이런 인식은 무척 당혹스럽다.
극소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중소기업의 영업환경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좋아질 근거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경쟁의 전선에 나선 대기업의 보급창으로서의 중소기업 지위는 크게 열악하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 한국의 간판기업들이 매출액은 큰 변화가 없는데도 사상 최대 이익을 구가하는 것은 중소기업의 눈물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실적의 비결이란 게 부담을 전가하는 원가 절감과 투자 유보로 나타난 까닭이다. 중소 제조업체의 3분의 2가 B2B 기업임을 감안할 때 말이 앞서는 상생협약보다 불공정 거래관행을 하나라도 고치는 게 더 중요한 이유다.
5월 중순 공정거래위원회는 대ㆍ중소기업 하도급 거래질서 개선방안을 내놓았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핵심기술을 탈취하거나 유용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기술자료 제공을 강요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대기업의 일방적인 계약 취소나 단가 인하를 낳는 구두발주의 폐해를 막기 위해 '하도급 계약 추정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개선내용보다 아직도 그런 행태들이 공공연히 자행돼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대기업의 횡포만 여전한 게 아니다. 중소기업의 규제애로를 해소해 주기 위해 지난해 7월 출범한'기업호민관'(중소기업 옴부즈맨)실이 최근 내놓은 '행정규제기관의 비보복적 정책 수립에 관한 연구'보고서는 규제ㆍ민원 행정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소상공인들이 불합리한 규제의 개선을 요청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보복 당했던 생생한 사례를 담은 이 보고서에 대해 공감과 공분을 표출하는 반응이 쏟아진 것도 그렇다.
벤처세대의 맏형으로 초대 기업호민관에 위촉된 이민화 KAIST 겸임교수는 누구보다 이런 점을 꿰뚫고 있다. 그는 대ㆍ중소기업의 불공정 거래구조를 내버려둔 채 중소기업 지원 운운하는 것은 '썩은 웅덩이를 방치한 채 모기를 잡겠다는 격'이라고 말한다. 또 미국의 중소기업 옴부즈맨 정책의 핵심이 비보복임을 들어, 관 우위문화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선적 과제는 비보복정책의 제도화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승자독식의 '뱀파이어 경영' 득세
최근 만난 한 기업인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한층 강화된 승자독식 체제로 흐르는 데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MB정부가 친서민 중도실용의 따뜻한 국정을 표방하지만, 정책의지와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뱀파이어 매니지먼트'가 되레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대한민국이 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대통령의 인식은 경제에 관한 한 맞지 않는다. 연말쯤 모든 계층에게 희망의 싹을 보여 주겠다고 누차 약속했으니 시간도 별로 없다. 그 뒤에는 레임덕이 기다리고 있다. 4대강 세종시 등 거대담론에 빠져 허우적댈 틈이 없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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